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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Feb 20. 2022

Ep5. 은평구 개업 시절 2

[나의 개업 역사]

당시 임대료는 전체 단독 건물을 사용하면서 월 500만 원을 냈었는데 물가가 상승하여 다르긴 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엄청 많이 저렴한 액수다. 그러나 그 비용도 시세에 비하면 너무 비싼 액수라서 내가 과연 몇 달이나 버틸지 주변 원장님들께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주변의 원장님들 서너 분이 매주 한 번씩 점심 식사 모임을 하시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그 모임에 끼게 되어서 그런 저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젊은 의사가 들어와서 그 많은 비용을 내고 과연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하였다. 알고 보니 내가 인수한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미 자리를 잡고 분만을 많이 하던 병원이 있었다. 당시 그 병원은 단독 건물도 아니고 한층만 임대하여 쓰던 병원이라 나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오산이었다.  병원을 인수하고 2년인가 되었을 때쯤 그 병원은 바로 옆에 시장을 낀 넓은 부지를 사서 상당히 큰 건물을 올렸다. 이름도 김 OO 산부인과에서 인정 병원으로  바꾸면서  갑자기 덩치가 커졌다. 은평구에서는 그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분만을 가장 많이 하는 병원이다. 복싱으로 치면  같은 체급인 밴텀급끼리 선수와 경기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헤비급 선수와  맞붙어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는 출산율이 지금처럼 낮지 않아서 월 분만이 대략 20여 명에서 30여 명 정도였다. 옆에 있던 김 OO 산부인과는 나보다 대략 두배 정도 분만을 많이 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원장님은 나보다는 나이가 몇 년 위였다. 간혹 의사회 모임이 있으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등 그리 사이가 나쁘지는 않게 지냈던 편이다. 내 생각은 옆에 있는 같은 업종의 병원은 분명 경쟁자이며 누구는 더 앞서가고 누구는 뒤 쳐지게 마련이지만 선의의 경쟁을 하여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상대 선수의 앞길에 물 웅덩이가 있으면 피하라고 알려 주고 나도 마찬가지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의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지역에서는 옆의 병원에서 진료받다 온 환자에게는 먼저 병원의 의사를 심하게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잘못된 대응이다.   옆의 병원 의사를 친구나 동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이나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동시대 사람일 뿐이다.


병원 1층은 외래, 2층은 분만실과 수술실, 입원실, 그리고 병원 3층은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사는 살림집이고 직원 숙소는 병원 1층에 있었다. 그때는 식사도 살림집인 3층에서 전 직원이 함께 먹고 해서 한 식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당시 접수 일을 보고 있었고 손이 모자랄 때는 수술의 보조를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개업 무렵에 간호조무사 자격을 따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직원은 3, 4 명 정도에 주방과 세탁을 함께 하는 여사님이 한분 있었다. 진료나 분만을 돕는 직원들은 간호사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간호조무사들이라 나이가 20대 초반이거나 많아야 30대 초반으로 젊은 나이었다. 대학병원의 경우 간호사들이 환자나 산모의 처치나 간호를 맡지만 개인 의원의 산모와 환자 간호는 간호조무사들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나 다 백의의 천사로 불리며 선생님으로 깍듯이 예우를 받았지만 지금은 조무사는 말할 것도 없고 간호사들도 환자들부터 무시당하고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들었다. 상호 존중의 정신이 의료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어디 가나 진상 손님은 있게 마련이다.  물론 환자의 갑질보다는 의사나 간호사 혹은 조무사 등의 갑질이 더 많기는 하겠지만.  


그때는 일도 많고 직원들과 거의 하루 종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정도 많이 들었다.  주말이면 서오릉 근처에 주말 농장도 10평 정도 빌려서 고추나 상추 등을 심고 삼겹살도 구워 먹고는 했다.  북한산 입구의 산성 마을까지 함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지금은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의 주말 시간이나 휴일 시간을 빼앗는 상사는 아마 갑질 상사로 SNS에 올라가기 십상일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름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 내가 자르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고 병원에 뼈를 묻겠다고 말한 직원도 있었다. 자기가 가진 직업에 대하여 평생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보수가 아주 높거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아닌 직종들에서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개업하는 동안 내가 만나본 수십 명의 직원 중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지금까지 불과 서너 명 밖에 안된다.  물론 그때 그 말을 한 직원은 병원에 뼈를 묻지는 않았고 대신 멀리 시집을 갔다.


당시에 내가 산모분들께 차별화된 서비스를 몇 가지 제공하였다. 냉검사 현미경 영상을 직접 보여준다거나 출력해 드리는 것, 산모들의 초음파 검사 영상을 비디오테이프나  CD에 구워드리는 서비스를 했다. 출산하고 나면 아기 사진은 폴라로이드로 찍어서 드리기도 했고 나중에는 컬러 프린터로 출력해 드렸다. 그러나 정작 나나 직원들의 사진은 많이 남겨 두지 못해 아쉽다.  몇 장 있지 않은 당시 사진을 앨범에서 꺼내어 보니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났다. 앨범을 뒤져보니 개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아내와 직원 그리고 아이들과 북한산이나 주말 농장에 가서 찍은 것들이 몇 장 있다. 사진을 보니 직원들은 이제 보지 못하니 비교해 볼 수는 없지만 나나 아내는 세월의  힘이 많이 느껴진다. 그때도 내 허리춤에는 예외 없이 삐삐라고 불리는 페이저가 달려 있는데 그때의 삐삐가 지금은 휴대폰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달라진 것이 없다.  무뚝뚝한 모습도 변함이 없다. 

개업 초에 함께 일했던 서너 명의 직원 중 한 명은 땅끝 마을로 시집을 갔고 십여 년 전 한번 잠깐 만나 보았다. 다른 한 명은 경기도 연천으로 시집갔는데 언젠가 둘째 출산을 위해 내가 운영하는 서대문구의 병원으로 온다는 것을 말렸던 기억이 난다.  다른 직원들은 세브란스에 취업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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