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면 내가 하면 안 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의술의 시작이다."
몇 년 전 임신 중절 수술 즉 낙태를 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낙태 근절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적이 있다. 낙태는 태아에게는 생명을 빼앗는 일이며 여성에게는 가장 빠르게 임신으로 인한 부담을 벗어나는 해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임신부의 건강도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내가 낙태 근절 운동에 참여하여 낙태 시술을 중단한 기간은 30여 년의 의사 생활 중 1/3에 불과하다. 그전까지 20년 정도는 낙태 시술을 했다. 아무리 출산을 설득하여도 안 되는 임신부들은 그렇게라도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낙태 수술을 할 때 보통 아기를 지운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낙태 수술을 하거나 받으면서 느끼는 죄책감을 덜고자 해서 일 것이다. 지운다는 말은 원래 틀린 글씨나 얼룩을 없앨 때 쓰는 말이지 태아에게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계획에 없었으니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태아를 지운다는 의미로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말로 위안을 삼기는 했지만 개업 초기에는 낙태 수술을 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적응이 되어서 별다른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기를 지운다는 말이나 태아를 없애달라는 말쯤에는 무덤덤해진 부끄러운 의사가 되어 있었다.
10여 년 전 다른 의사 둘과 함께 동업을 했다.
날씨가 좋았던 어느 주말 오후.
다른 원장의 담당 산모가 진통으로 오전 일찍 입원하였으나 오후가 되도록 출산을 못하고 있었다. 주말이나 야간의 당직 근무는 분만을 주로 담당하는 나와 다른 남자 의사가 교대로 했다. 그날 당직 근무는 나였다. 오후 1 시 넘어 산모를 인계받고 내진을 하고 태동 검사로 태아 상태와 자궁 수축을 확인했다. 내진 상 골반은 좁은 편이었지만 태아가 많이 크지는 않았다고 인계를 받았다. 태동 검사에서 태아 심음은 정상이었고 자궁 수축은 강도가 약하지 않게 2분 남짓의 간격으로 있었다. 두어 시간이 더 지나도록 역시 진전이 없었다. 난산에 속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내진을 하여 보니 골반에 아기 머리가 꽉 끼인 상태로 쉽게 골반을 빠져나올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연분만이 어려워 보였다.
자연분만을 위해 긴 시간 진통을 참으면서 지금까지 애써온 산모에게는 안타까운 말이기는 했지만 자연분만이 힘들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산모는 이미 탈진도 되고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아 내 이야기에 수긍하는 듯했지만 남편은 자연 분만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수개월간 진료받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수술로 출산해야 한다고 말하면 선뜻 납득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계속 자연 분만을 시도할 경우 산모도 힘들겠지만 자궁 안의 태아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산모와 남편 두 분이 잘 상의하여 수술을 결정하게 되면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아기의 머리가 골반 내에 걸린 채로 여전히 진행이 되지 않았다. 골반강에 정말 진입한 채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1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분만은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흡입기와 같은 기계의 도움으로라도 낳고 싶다고 하였지만 흡입기도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제왕절개 수술로라도 빨리 출산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아기가 위험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남편은 꼭 자연분만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좀 더 시도해 보자고 하는 사이 또 시간쯤이 지났다. 역시 진행이 되지 않고 더 지체하기도 어려워 결국 흡입분만에 따르는 위험을 설명드리고 흡입 분만을 시도하였다. 흡입기를 이용한 첫 시도에서 태아의 머리는 조금 내려오기는 했으나 여전히 골반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에는 직원이 팔뚝으로 배밀기를 하면서 흡입분만을 시도했다. 태아가 내려오다 멈추어 흡입기마저 탈락하면서 실패했다. 흡입 분만을 하다 실패하여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될 경우 이미 태아가 골반강 내 깊숙이 진입한 상태라서 제왕절개 수술 시 위로 태아 머리를 올려서 빼내야 하기 때문에 자궁 파열이 많이 되는 편이다. 또한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기의 생명과 건강이 매우 위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팔은 긴장감으로 떨렸다. 흡입기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빌면서 온몸의 힘을 손에 모아서 3차 시도에 들어갔다. 총 십여분 이상 비교적 긴 시간이 걸려 어렵게 흡입 분만으로 아기 머리가 골반강을 지나 질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제왕절개를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출산 후 아기는 제대로 울지 못했다. 태어나면서 아기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다. 자발 호흡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기의 건강을 나타내는 아프가 점수는 호흡과 근육 긴장도, 자극에 대한 반응, 피부색, 심박수를 가지고 평가하는데 울지 않는 아기는 이 모든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심박은 유지되었지만 나머지 점수가 낮아서 산소를 투여하면서 인공호흡을 했다. 얼마쯤일까? 실제로는 몇 분 되지 않겠지만 느낌상으로는 굉장히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아기가 조금씩 반응을 하면서 약하게 울음을 토해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 새도 없이 재빠르게 근처 대학 병원에 연락을 하였다.
동시에 119로 연락하여 이송하였다. 이송 간 아기는 호흡은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뇌 초음파 검사에서 뇌실 내에 출혈이 관찰되었다고 들었다. 즉 저산소증에 의한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다. 뇌손상의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니 이미 지옥은 흡입기를 아기 머리에 대는 순간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며칠 후 아기는 생명은 유지하면서 자극에 대하여 약간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정상적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내린 최종 진단은 저산소증에 의한 뇌성마비였다.
뇌성마비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자궁 내에 있는 동안 태아가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거나 혹은 감염으로 인하여 뇌 기능에 손상을 입는 경우다. 둘째, 출산 과정 동안의 문제 즉 난산으로 인해 저산소증이 발생하면서 뇌실 내에 출혈이 생기고 뇌손상을 입는 경우다. 책에 쓰여있는 이런 문장들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죽어 있는 글자들이지만 이것이 자신의 앞에 현실로 닥쳤을 때는 그 문장 하나하나는 칼이 되어 가슴을 헤집는다.
내가 출산을 도왔던 아기의 뇌손상 원인이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보통 난산이 되는 경우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다. 일단 순조로운 자연분만에서도 뇌손상이 생겼을 경우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터에 난산이 되어 흡입분만까지 한 상태에서의 악 결과는 의사에게는 치명적이다.
이런 경우 조속히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하지 않고 무리하게 흡입분만을 시도하였다는 점 때문에 의료 분쟁으로 연결되기 쉽다.
십 여일 후 아기는 퇴원하였다. 아기 아빠가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왔다. 아기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고 뇌손상을 입었다고 하는 한쪽 머리는 발육이 좋지 않아 심한 짱구처럼 보였다. 눈앞이 어둡고 잠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에게 아기 아빠가 던진 말은 평생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괴로운 말이었다.
“내 아기를 죽여주세요.”
임신 초기의 태아 살해, 낙태 시술쯤에는 별 다른 느낌도 들지 않던 내게도 그 말은 충격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눈앞이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살인 청부업자도 아닌 의사인 나에게 아기를 죽여 달라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말씀드렸다.
“죄송합니다. 그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기 아빠는 아기를 나에게 던질 듯 밀며 계속 압박을 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 구실 못하는 아기를 키울 수가 없으니 당신이 책임지고 안락사시켜 주던지 아니면 키우던지 알아서 하시오."
죽이거나 키우거나.
내 앞에 놓인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난산에 대하여”
그림에서 좌측은 침팬지의 골반이며 우측은 사람 여성의 골반 모습이다. 침팬지의 경우 골반과 태아 머리 사이에는 상당한 여유가 있지만 인간 산모의 골반과 태아 머리 사이에 여유 공간이 거의 없다. 인간 아기의 출산 시 난산이 생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런 해부학적인 구조가 가장 큰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