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질문 찾기]는 지금 인생에서 가지고 있는 질문을 찾아보고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워크샵이다. 여기저기 워크샵을 하러 다닌 덕분에 여러 사람, 특히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질문에 관해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상당한 비율의 사람들이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 말한다. 왜 사는가. 무척이나 진부한 질문임과 동시에 영원히 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거대한 질문. 늘 생각하는 것 같아도 막상 답해보라 하면 대답하기 힘든 이 질문.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 던지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서 삶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들어봤지만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실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왜 사는지도 알 수 있는 건 아닐까? 왜 우리는 왜 사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하고 산다는 건 무언인지 생각하지 않지? 인간의 조건은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삶을 이루는 조건들에 대해서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면 덧없는 질문들에 대한 작은 조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조건은 서론에서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가 지구를 떠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예능 프로그램이 흥행할 정도로 ‘우주여행’이라는 말이 부쩍 가까이 다가온- 인간은 우주를 호기심과 미지,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지구를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키워왔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런 인간의 욕망이 지구소외를 만들어낸다며 이렇게 단언한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 처럼 지구는 우주에서 인간이 별 다른 노력 없이 그리고 그 어떤 인공물도 없이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다. 신판 78, 서론
어떻게 하다가 인간들은 지구를 벗어나도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오만하고도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덕분에 인류의 주의는 지구 표면으로부터 달아나 땅 위에서의 ‘좋은 삶’이 아닌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있다. 지구와 지구에 사는 다른 생명들과 착실하게 멀어지면서 철저하게 착취하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지구소외’로부터 왔다. 인간의 조건은 기술과학 중심의 사고방식에 이미 절여져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실은 훨씬 더 인간다운 방식일 수 있는 ‘사유’에 기초해서 인간의 조건을 기술한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이야기에서 풀어가며 인간의 조건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을 ‘노동’, 자연을 이용해서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만드는 ‘작업’,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정치의 장을 만드는 ‘행위’ 세 가지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를 ‘인간이 지상에서 삶을 영위할 때 주어져 있는 기본 조건(탄생과 죽음)들과 일치’하는 인간의 근본 활동이라고 한다.
그리스 시민들은 여성과 노예를 소유함으로써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로 인해서 ‘행위’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가능성을 얻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만이 폴리스의 자유롭고 공적인 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활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의 삶이라 부른 ‘좋은 삶’은 단지 일상의 삶보다 더 훌륭하고 더 평안하고 더 고상한 생활이 아니라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이다. 단순한 삶에서 드러나는 필연성을 지배하고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생존에 대해 갖는 내적 충동을 극복하는 정도에 있어서 더 이상 생물학적 과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 때 이를 ‘좋은 삶’이라 부를 수 있다. 신판 118, 각주 31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행위만이 남은, 특히 그중에서도 사색과 진리 탐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관조적인 삶’을 가장 우위에 놓았다. 이는 노동과 작업과 같은 필수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인간의 조건들을 제외함과 동시에 세계와 적극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조적인 삶만이 자유롭고 가치 있는 삶으로 여기게 했다. 아렌트가 말하고자 하는 ‘좋은 삶’은 조금 다르다. 활동적 삶이라고 부르는 아렌트의 좋은 삶은 오랜 전통으로부터 기원했지만 어쩌면 여태까지 없었던 삶일지도 모르겠다. 노동과 작업, 행위 그 어느 것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삶. 세계를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얽고 얽히는 삶.
그러나 인류는 활동적 삶과 차근차근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것은 ‘세계소외’ 현상이다. 신대륙 발견과 망원경의 발달은 인간의 감각과 실제적인 것을 떼어놓으며 우리의 관계를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서식지로부터 전 지구적으로 확대해 버린다. 종교개혁을 통한 사적 재산 몰수와 같은 일들은 사적 소유를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노동 계급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적 세계관과 맹목적인 과학 기술 중심주의와 경제성장 신화지 더해져 행위는 인간의 조건에서 자리를 잃어갔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철저한 세계소외와 지구소외, 그리고 노동이었다. 공론 영역은 축소되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모두 사라지며, 사유하지 않고 노동하는 노예들만 남았다. 이들은 누군가의 노예도 아니었다.
공론의 영역을 잃어버린 이들은 ‘텅 비어버린’ 것과 같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세계와 교류하며 그 안의 나의 위치를 찾는 것이 인간이지만 세계와 지구와 단절되니 삶의 목적과 이유를 상실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알아내야 했다.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서 멈춰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자기 감각도, 타인의 감각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은 의심을 가지고 이승을 떠돌아야 했다.
근대인은 엄격히 말하자면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도 내던져졌고 폐쇄된 자기반성의 내부로 내던져졌다. 여기서 그가 경험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계산하는 정신의 텅 빈 과정이며 자기자신과 행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신판 439, 6장 45절 초반
자기반성이라는 이름의 죄책감, 자격지심, 우울의 고리를 끊어낼 방법은 오직 ‘행위’의 영역으로 뛰어드는 것뿐이다. 다원성을 전제로 한 행위에서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존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다원성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 반드시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존재 이유가 되어줄 수도 있다. 더 이상 ‘왜 사는가?’ 같은 질문에 맴돌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나만이 가능한 주체적이고 고유한 삶. 그런 삶을 상상하고 꾸려갈 힘은 행위에서 나온다. 그리 거창할 필요도 없이 작은 대화에서부터 시작해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유효하다.
만약 인간 상호관계의 무한성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다수성에 기인할 뿐이고 또 행위를 파악가능한 환경의 제한적 구조 안에 국한함으로써 이 무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행위를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 행해진 가장 사소한 행동도 똑같은 무제한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하나의 행위, 가끔은 한마디 말이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판 290-291, 5장 각주 17
아렌트는 행위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며, ‘영웅’은 특별한 업적을 이룬 자들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한다. 목소리를 내자. 인간으로서 주어진 행위의 자유를 마음껏 사용하며 나를 표현하자. 그것만으로도 소외된 세계와 지구를 구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