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다

오후의 산행

by 팔레오

금속탐지는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당일 아침 일찍 움직이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점심 먹고 무료함을 느끼다 문득 금속탐지가 땡길 때도 있죠. 이런 제 생각을 알아챈 눈치 빠른 스마트폰이 보물지도를 주르륵 보여줍니다. 시계를 보니 1시가 훌쩍 넘었네요. 오고 가는 시간을 따져보니 애매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데 산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금속탐지기가 제 팔을 붙잡고 문을 나갑니다. 어쩔 수 없네요. 속절없이 저는 탐지기를 따라 산으로 끌려갑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딱 한 곳만 가자고 말을 합니다. 한 곳만 노리고 가면 꽝을 칠 확률이 높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보기로 합니다.



그닥 높지 않은 고갯길을 수월하게 올랐는데 공교롭게 나무가 쓰러져 있습니다. 예상 포인트에 나무가 이처럼 쓰러져 있으면 탐지를 하는데 큰 지장이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쓰레기가 참 많은데, 대부분 몇십 년 된 레트로한 쓰레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옛날 칠성사이다병입니다. 요즘 것과 디자인이 다르지요. 80년대 소풍 필수품이었다던 추억의 병입니다. 나름 귀하지만 산을 다니다 보면 이따금 만날 수 있습니다. 대략 만 원 정도 가치가 있죠. 빈병 줍는 재미를 아는 저로서 못 본 척 할 수 없네요.



해피라면을 기억하시나요? 신라면과 안성탕면이 나오기 전이었던 80년대쯤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맛보았을 때 신세계였습니다. 라면 삶는 냄새도 단번에 알아챌 정도로 풍미가 기존 라면과 확 달랐죠. 한동안 이것만 먹었는데 아쉽게도 몇 년 만에 단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운 라면의 향이 0.001%라도 날까 궁금해 봉지를 주워 냄새를 맡아보니 퀴퀴한 흙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뭐 당연하겠죠.



우왓! 오래된 반지가 나왔습니다.



새끼손가락에만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여인네가 끼던 반지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를 산길에 흘리게 되었을까요? 잃어버린 걸 알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ㅠ

아주 투박스러운 모양새와 재질감으로 미루어 요즘 반지는 아닌 듯합니다.


집에 굴러다니는 지환봉에 끼우고 고무망치로 살살 두드려 찌그러진 것을 펴주었습니다. 지환봉이 있는 이유는 지난번 소개했던 은장도 말고 가끔 반지도 만들기 때문에...



고개 부근 나무옆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쉬던 중 바로 옆에 돌이 드문드문 쌓인 걸 뒤늦게 알아챕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무 주위를 스캔해 보니 여러 곳에서 신호음이 들립니다. 맨 처음 일제시대 알루미늄 1전이 신고식을 하네요.



옛사람과 제가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마침 쉬고 있는 곳에 옛사람도 쉬면서 동전을 묻어두었네요.



두 번째로 호조에서 만든 당오전이 등장합니다. 큼직하고 두툼한 것이 참 좋습니다.



평양감영에서 만든 당일전입니다. 동전 구멍이 보통 당일전보다 크고 글자가 비교적 희미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한 데다 서체나 재질도 별로라 당일전 중에서 가장 푸대접을 받습니다. 물론 개중에 귀한 것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것을 1,000원보다 비싸게 산다면 흑우 인증입니다.



이런 게 참 좋죠. 서체도 멋지고 선명한 중형전입니다. 이런 건 10,000원이라도 살 만합니다.



메이지(明治) 17년에 발행한 1전입니다. 메이지 17년이면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1884년이니 무려 140년이 넘었네요. 일본도 조선처럼 관영통보라는 엽전을 사용하다 메이지 3년(1870년)부터는 이와 같은 근대식 동전을 통용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늦은 1884년에 시주화를 만들었으나 본격적으로 통용이 시작된 건 188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일본 동전이라 뭔가 못마땅한 부분도 있지만 이무기가 새겨진 동전 그 자체는 도안이 좋습니다.



경기감영에서 만든 당오전입니다. 구리 함량이 적고 얇아서 힘을 주면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죠. 그나마 이건 같은 당오전 중 글자라도 선명합니다. 조선 말기의 경제 상황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엽전입니다.



금위영에서 만든 중형전 천자문전과 호조에서 만든 당일전입니다. 중형전과 당일전의 크기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금속탐지에서 당오전은 비교적 드물게 나오는 편인데 오늘은 꽤 자주 나옵니다. 모두 경기감영에서 만든 것이네요.


장도 부품이 나왔습니다. 나무로 된 부분은 썩어서 사라졌다 치더라도 고리도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희한한 엽전(?)이 나왔습니다. 철재질에다 구멍도 중심을 빗겨나갔습니다. 아마도 엽전꾸러미 사이에 슬쩍 끼워 사용했던 위조엽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재미있는 물건이네요.

전에는 납으로 된 가짜 엽전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최종 결과입니다. 나무 반경 1m도 안 되는 좁은 곳에 엽전이 많이도 숨어있었네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탐지기에게 끌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망설이다 낮잠이나 자버렸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친구들입니다.



고갯길 주변에서 나온 쓰레기는 환경을 생각해 늘 그렇듯 봉투에 담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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