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의 제왕
나는 동해안 무늬오징어 낚시 원년 멤버다.
그러니까 그때가 2007년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ㄱㅈ'라는 친구가 죽변항 인근에서 돌아다니던 무늬오징어를 목격한 것이다.
한마디로 동해안 에깅낚시의 선구자로 추앙받고도 남을 이 고딩은 뛰어난 실험정신으로 당시 제주도나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나 겨우 행해졌던 에깅낚시를 시도해 보았는데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며칠 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반신반의하며 한 개에 10,000원이나 하는 야마시타 에기 하나를 구한 다음 합사줄도 아닌 카본줄이 감겨있던 민물 루어대에다가 급하게 채비를 하고는 바다로 달려갔다. 캐스팅 후 하나밖에 없는 비싼 에기가 밑걸림이 생기면 그날 낚시 끝이므로 바닥에 가라앉기 전 급하게 흔들어 저킹하고 또 저킹하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낚시하는 줄 알았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대책 없는 낚시였지만, 당시 오징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첫 출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벌건 대낮에 무려 8마리나 잡아내고 말았다.
그것도 뜰채가 없으면 그대로 들어뽕 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녀석들이 자주 나왔다.
씨알 좋은 녀석은 릴의 드랙을 찌이익~하고 풀려나가게 할 정도로 차고 나가는 힘이 좋았다. 때문에 처음엔 오징어가 걸린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결국 그래봐야 오징어였다. 다년간 찌낚시나 루어낚시로 감성돔, 벵에돔, 농어 등 바다의 강자들을 숱하게 상대해 보았기에 잡아내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당시 무늬오징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나를 포함한 낚시인들은 밝을 때 낚시하다 해가 지면 바로 철수를 했다. 오징어 낚시는 해가 지고 나서 입질이 폭발할 시간인데 그때는 미처 그걸 몰랐다.
그러다가 낚시방에서 일본 야마시타 필드테스터이자 에깅낚시 마스터인 '카와카미 에이스케'를 어렵사리 초빙하였는데, 덕분에 한 수 아니 열 수를 배울 귀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날은 공교롭게도 바람과 파도가 심해 낚시를 해볼 만한 갯바위가 없었다.
때문에 파도의 영향을 덜 받고 바람을 등질 수 있는 인근의 대형방파제 찾았다.
그는 차원이 다른 저 세상의 현란한 저킹 동작과 스킬을 선보였고, 결국 극악의 바다상황에서도 여러 마리의 무늬오징어를 연거푸 낚아냈다.
나는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덕분에 낚시 기법들과 무늬오징어의 생태나 습성 등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이후로 기술이 진일보해 수년 동안 낮이든 밤이든 출조할 때마다 엄청나게 무늬오징어를 잡았다. 냉동실에 오징어가 처치 곤란할 정도로 꽉꽉 들어차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인심도 쓰고 그랬다. 심지어 낚시하다가 말 몇 마디 섞은 생면부지의 관객들에게까지 술안주 하라며 몇 마리씩 나눠주기도 했다.
또 잡으면 되니까
예전엔 수산시장에 가면 "사장님~ 오징어 만 원에 몇 마리에요?"하고 묻는 게 국룰이었는데 이제는 한 마리 최소 10,000원은 기본에다 그나마 씨알이 좀 봐줄 만하다 싶으면 20,000원을 가뿐히 넘어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도 고급 무늬오징어도 아닌 일반 살오징어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 직접 잡아먹을 심산으로, 아직은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를 8월에 무늬오징어 낚시를 다녀왔다.
하...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바람도 세고 너울성 파도가 은근히 심했다. 갯바위에 진입하고 낚싯대를 채 몇 번 흔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펑~ 하고 갯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 포말을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철수
이 포인트로 말하자면, 골장항 갯바위로 오래전엔 경쟁자가 거의 없어 올 때마다 혼자서 도둑놈처럼 조용히 씨알 좋은 놈으로 10마리씩 골라서 가져갔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 가을 본시즌이 되면 에깅꾼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꽉 들어차 한자리 비집고 들어가기에도 참으로 버거운 곳이 되어버렸다.
인근 테트라포드가 있는 방파제에 들러보았으나 곳곳이 젖어있어 여의치 않았다. 이런 곳은 빙판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미끄러워 가족을 위해 생명보험 정도는 들고 낚시해야 그나마 원망을 덜 받을 것이다.
여기도 오래전 한치를 비롯해 무늬오징어를 마릿수로 낚았던 곳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아닌 듯하다.
파도를 덜 받는 작은 내항 방파제엔 이미 예닐곱 명 이상 오징어 낚시꾼들이 붙었다.
그 와중에 쓰레기...
버려진 것이 쓰레기인지...
버린 자가 쓰레기인지...
개인적으로 사람이 없는 장소를 매우 선호하기에,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다 마침내 한적하면서 너울성 파도도 덜 받는 딱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그동안 안 쓰던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갈까 두려워 살살 흔들면서 워밍업을 하다가, 해가 떨어지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열심히 흔드니 씨알 좋은 녀석이 바로 에기를 물고 늘어졌다.
우와~ 올해 무늬오징어 첫 수로구나!
시즌 초반치고는 좋은 씨알이다. 아직은 시메(신경을 절단해 즉살하는 것, 그래야 오징어가 신선)를 하기 전...
무늬오징어의 생명을 끊는 시메를 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지만,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하리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 ㅠ
곧이어 두 번째 입질이 이어졌다. 조금 전 것보다는 작은 씨알이다.
세 번째 입질이 왔다. 건져보니 두 번째 것과 씨알은 비슷하나 에기를 쭉 당겨가는 입질만큼은 시원했다.
오늘은 더이상 욕심내지 않고 3마리만 잡고 집으로 ㄱㄱ
오자마자 바로 손질하고 먹을 준비를 했다. 낚시도 재미있지만 이 순간 역시 즐겁고 군침이 도는 시간이다.
씨알이 좋은 녀석은 회로, 작은 녀석은 숙회로 변신했다.
정성 들여 잘 썰면 횟집 주인만큼 썰 수 있긴 한데 , 너무 오랜만이라 빨리 먹고픈 마음이 앞선 나머지 대충 막 썰어 모양새는 별로다.
어쨌거나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무늬오징어의 맛은,
그 맛은...
그야말로...
입맛을 위한 낚시는 무늬오징어를 따라갈 게 있을까 싶다.
< 팔레오의 평가 >
손맛 ★★
입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