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무사하기를 믿지 말라 - 채근담

CEO에게 과제 보고를 드리는 중이었다. 나 같은 일개 팀장이 CEO를 만날일이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비공식 과제에서 정식 과제로 승인할 때 한번 보고드렸으니 2년도 더 지나 드리는 첫 보고였다. CEO가 물러나기로 결정된 상황에다 그간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니 만큼 그리 큰 부담도 없었다. 한참 보고를 드리고 있는데 CEO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답변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발언을 하셨다.


“이 과제는 여기까지 하고 중단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우리 회사의 사업과 잘 맞지 않아.”


그렇게 과제 종료가 급작스럽게 결정되었다.

보고를 끝내고 망연자실한 채 회의실을 나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음 보고를 준비중이던 동료 팀장 두명이 바짝 긴장한 채 물어왔지만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그런 느낌이었나 싶다.


내 뒤를 이어 보고를 드린 두명의 팀장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그들 과제를 당장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결국 내 과제만 중단이다. 보고에 이어 CEO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 CEO가 술잔을 채우며 말을 건네셨다.


“내가 요즘 술을 끊으려고 노력 중이야. 내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그런데 당신 때문에 오늘은 마셔야겠어.”


그렇게 나는 CEO가 친히(?) 따라주는 독한 소주를 몇 잔 연거푸 마시며 억지 미소를 지으며 위로의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로의 말도 술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늦은 저녁 회사 사무실 자리에 않아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술을 많이 마셨지만 취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억울한 마음만 불쑥불쑥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취기가 남아있긴 했던 듯 하다. 억울함에 이어 올라온 서러움에 결국 소리 죽여 울었다.


다음날 팀원들에게 과제의 중단을 알렸다. 다들 망연자실해 했고 나는 그들을 다독였다.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했으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해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별일 아니라고. 나도 못 믿을 말을 믿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설득했다.


소식을 들은 동료 팀장들은 나를 위로했다. 물론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은 고마웠다. 그리고 다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식에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보고 중에 CEO가 과제 중단을 지시하다니 정상적이지는 않은 방식이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 동안 그런 식으로 중단된 적이 없으니 더더욱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어떤 팀장이 위로주를 마시면서 농담 삼아 이런 말을 건넸다.


“CEO가 직접 과제 문을 닫아준 것은 김팀장이 처음일 겁니다. 이거 영광스럽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 스스로와 팀을 빨리 추스려야 했다. 마음은 그런데 쉽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모르겠고 매일 매일 지쳐만 갔다.

어느 휴일 채근담을 넘기다 문득 한 문장에서 손이 멈추었다.


毋憂拂意 毋喜快心 毋恃久安 毋憚初難

(무우불의 무희쾌심 무시구안 무탄초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며 마음이 흡족하다 기뻐하지 말라.

오랫동안 무사하기를 믿지 말고 처음이 어렵다고 꺼리지 말라.

- 채근담 (소담출판사, 자이원밍 해설, 하권 p64-65)


지금의 나를 위한 말이구나. 내가 언제부터 안정적인 과제를 했다고 이렇게 낙담을 하고 있는가? 내가 아이디어 하나 들고 과제를 제안할 때 정식 과제가 되기를 바랄 지언정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과제를 시작할 때 내 바람은 단 하나였다. 제발 내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검토라도 할 기회를 주었으면. 그 기회를 받고 나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책상 하나였다. 그것도 다른 팀들 사이에 비어있는 자리 하나. 그나마 그것도 한달이 안되어 다른 자리로 밀려났지만.


석달간 논문을 뒤져가며 공부해서 아이디어를 가다듬었다. 나만의 독창적인 것을 추가하고 제안하여 겨우 실험할 테이블 하나를 받고 얼마 후 첫번째 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디어를 실험으로 검증하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험실을 추가로 배정받고, 팀원을 추가로 배정받고 그렇게 나의 아이디어는 비정규 과제지만 신규과제로 틀을 갖추어 갔다.


그렇게 씨앗의 상태로 2년 반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고서야 겨우 정식 과제가 될 수 있었다. 정식과제 승인 받았을 때 나포함 달랑 3명이었던 팀원은 정식으로 승인 받고 8명까지 늘어났다. 정식과제가 되고 그렇게 착실히 2년 반을 달려왔었다. 돌아보니 내가 편안한 상태가 된 것은 1년 좀 넘은 기간이었다. 전체 5년 중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 절반이었고 정식과제가 된 후에도 인력부족으로 버둥거린 시간이 절반이었다. 그런데 다시 시작으로 돌아왔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니. 고작 시작단계로 돌아온 것뿐이다. 모든 것을 중단하라는 것도 아니고 다시 시작하라는 것일 뿐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내가 언제부터 그리 높은 곳에서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었다고 이리 힘들어 하는가?


뜻대로 되지않는다고 근심할 것이 무엇인가? 세상일 뜻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다고.

마음이 흡족하다고 기뻐할 것은 무엇인가? 나를 만족시키는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간다고.

오랫동안 무사하기를 구한다고 그게 구해지는 것인가? 항상 위태롭게 흔들리는게 세상 이치인 것을.

처음이 어렵다고 손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그러니 그냥 부딪히는 수 밖에.


1~2개월이 지나 나와 우리 팀이 안정을 찾아갈 때 나와 함께 보고를 드린 두개의 과제도 중단이 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새로운 CEO와의 리뷰에서 연구소 과제 중 절반이 날아갔다. 말 그대로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나는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를 위로하던 팀장들은 당황했고 이미 평정심을 찾은 경험자로써 그들을 위로했다. 다 지나갈 것이라고. 그러나 기대와 달리 몇번의 여진이 지나가고 더 많은 과제들이 정리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채근담의 경구를 되새겼다. 오랫동안 무사하기를 구하지 말고 처음이 어렵다고 꺼리지 말라.


한참이 지난 후 어느 날 문득 CEO와 술을 마실 때 지나가듯 CEO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이게 맞는 거야. 내가 정리하는 것이 맞는 거야.”


떠나는 CEO가 왜 일개 과제를 손수 정리했을까? 내 맘속에 오랫동안 잠자던 의문이 풀렸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어느 시점에 과제에 대한 리빌딩 계획은 이미 있었고 예정된 수순대로 일이 진행된 것 뿐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우리는 평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줄 알고 방심하고 있다가 재연재해를 맞은 것처럼 쓸려간 것 뿐이고. 크게 서러울 것도 없고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냥 그 시점에 큰 변화가 필요했고 그 방향이 더 옳은 방향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항상 경계할 뿐이다.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록 과제가 떠내려가도 내가 떠내려가지는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하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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