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면
아들 녀석이 기말고사 기간이다.
“내일 뭐 시험봐?”
“글쎄. 확률 통계인가?”
“그 다음날은?”
“음… 뭐였더라? 국어하고 화학이었던 것 같은데?”
“확통은 지금 해봐야 의미 없고 국어하고 화학은 다 봤어?”
“대충.”
“몇 번 봤어?”
“좀 만 더 보면 한번 훑어볼 수 있어.”
음 내일이 시험 시작이니까 아무래도 이번 시험도 글러먹은 것 같다.
시험을 대충 준비하는 것을 보고 답답하지만 내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험을 봐왔다. 그래서 나름 시험 준비의 비법 같은 것도 생겼다. 수학같이 이해의 영역인 것은 조금 논외로 치고 대부분의 시험은 5번의 법칙이 통한다.
시험 범위가 정해지면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며 암기하려고 노력한다. 매우 지루한 일이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때 선생님이 강조 했던 부분은 가능하면 암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일단 예상문제와 기출문제를 푼다. 대충 중요한 것들이 그려진다. 다시 시험범위를 두번 정도 더 읽어 내려간다. 이제 시험 범위를 3번 보았다. 이쯤 되면 대부분은 외웠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충 파악이 된다. 시험 전에 2번 정도 더 본다. 사실 4번째부터는 슬슬 지겨워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부분과 아직 다 못 외운 부분을 알기에 약한 부분 위주로 읽어 나가면 된다. 첫번째 읽기 과정에 하루 이틀이 걸렸다면 마지막 5번째 읽을 때는 30분도 안걸린다.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 효과는 확실하다. 내가 이 방법으로 공부했을 때 대부분은 A를 맞았다. 만약 A를 못 받으셨다면 7번의 법칙으로 변경하시기를 권한다. 물론 9번, 11번도 꽤 괜찮은 법칙이다.
예전에 대학 선배 중에 진인사 대천명 (盡人事 待天命)을 모토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의 사인 대신 쓸 정도였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는 왜 천명을 기다리지? 그러한 삶은 너무 수동적인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늘의 뜻 따위는 하늘의 명 따위는 기다리지 않고 내가 나의 의지로 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젊었고 세상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진인사'가 아닌 '대천명'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었기에 더 반감이 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표현을 좋아한다. 이 글의 방점은 '대천명'이 아닌 '진인사'에 있기 때문이다.
진인사. 사람(人)이 할 수 있는 일(事)을 다 했는가(盡)? 정말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했는가? 정말 극한에 이르기 까지 다 했는가? 더 이상 할 것도 할 힘도 없을 때까지 했는가? 진(盡)은 “다하다”, “모두 써버리다”, “극에 달하다”, “다 없어지다”는 뜻이 있다. 다 써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더 이상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가? 그 때에 이르러서야 진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때가 되어야 우리는 대천명 하늘(天)의 뜻(命)을 물을 자격을 갖게 된다.
그 전에는 아직 하늘의 뜻을 기다릴(待) 자격이 없다. 좀 더, 좀 더 내 할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해야만, 해내야만 한다. 내 모든 것을 소진하는 삶. 그것은 절대 수동적이지 않다. 지극히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이다. 모든 것을 써버렸기에 후회 따위는 남기지 않는 사람이다. 어차피 모든 할 바를 다 했기에 후회가 없다. 다시 해도 내 한계는 거기까지 일 테니까. 이쯤 되면 하늘의 뜻을 기다려도 떳떳하다. 후련하다.
물론 모든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적절히 에너지를 분배해야 한다. 어떤 때는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어떤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사실 하고 싶은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해야 하는 일 해내야 하는 일을 위해 에너지를 다 쏟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이러한 상황에 마주치는 일이 흔해진다. 그러니까 이것을 해내는 것, 이것을 해낼 수 있게 되면서 차츰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아들에게 벌써부터 '해야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서 “진인사 대천명” 하는 경험은 해 봤으면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만큼 사랑하는 일을 하나쯤은 찾았으면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는 것도 진인사를 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일생에 꼭 한번 가졌으면 하는 경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