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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 회사원 김씨 Dec 04. 2023

장자(莊子) 현해 이야기 – 없음은 없고 있음만 있다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나는 작년부터 탈모약을 먹고 있다. 어느 순간 머리숱이 줄어들더니 이마가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거울을 보지만 나는 그 변화를 잘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와이프가 더 빨리 알아차리고 머리를 심자는 제안을 했을 지경이다. 다들 늙어가지만 유독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젊은 시절의 내가 없다. 40대의 중년 남자가 있을 뿐. 그렇다고 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20대의 나, 30대의 내가 없을 뿐이다. 이건 모든 사람들이 겪는 또는 겪을 일이다. 아마 70대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40대의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자여(子輿)가 말했다. “위대하구나! 저 사물의 만듦이 나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드는구나! 구부러져 등이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향하며 턱이 배꼽에 숨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아졌고 목뼈가 하늘을 가리키니, 음양의 기운이 모두 뒤죽박죽이구나!”

 자여의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런 일도 없는 듯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 우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말했다. “아! 저 사물의 만듦이 또 나를 계속 뒤틀리게 만들려 하는구나!”

-      강신주의 장자수업 (강신주, EBS Books, 2권, p69)


 자 어느 날 당신의 등이 구부러지고 어깨가 머리보다 더 올라가기 시작한다. 꼽추 라고 알려진 척추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자여가 우물에 자신을 비춘 것처럼 당신이 거울 앞에 섰을 때 젊은 시절 20대의 모습이 사라지고 중년의 당신을 발견했을 때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 안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없어지고 낯선 존재가 거울 앞에 서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거울 속 존재는 분명 나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싫어도 변하지 않는다. 


자래(子來)가 죽어갈 때 자려(子犁)가 찾아온다. 

자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양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거대한 대지는 형체를 주어 나를 싣고, 삶을 주어 나를 일하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네. 그래서 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죽음을 긍정하는 이유네.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이고 있는데, 쇠붙이가 뛰어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명검 막야가 될 거야!’ 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 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 한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      강신주의 장자수업 (강신주, EBS Books, 2권, p70)


죽음 앞에 선 ‘자래’는 담담히 말한다. 자신은 대장장이가 녹이는 쇠붙이와 같다고.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무엇인가를 만들 듯 ‘변화의 만듦’ (造物)이 자신을 만들어 냈다고. 그것이 칼일 수도 있고 호미일 수도 있다. 여기서 ‘변화의 만듦’을 신(神)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있어 무언가를 주재(主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자연적 생성과 변화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칼로 빗어진 내가 이제 다시 녹아 쇳물이 되려 한다. 죽음은 없음 사라짐이 아니라 칼이 쇳물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있음이 없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있음이 변화하여 다른 있음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문제는 내가 칼이었는데 쇳물이 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쇳물이 되었다면 다시 꼭 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사람이었으니 계속 사람일 것이라고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쇳물이 칼이 되었던 것처럼 우연히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 뿐이다. 그러니 계속 사람으로 존재하겠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마치 칼이 쇳물이 되어서도 꼭 칼이 되겠다는 것처럼. 이러한 생각을 고집한다면 우리의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이행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사람인 나는 없어지는 것이니까. 나는 사람이었으니 앞으로도 사람일 것이다라는 믿음과 열망이 결국 내세를 만들고 종교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라도 계속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지옥에 가서 마저 사람이고 싶어서. 장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집착에 대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한다. 우연히 얻어진 사람의 삶이 없어진다고 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변화하여 존재할 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변화하는가?

조금 앞에 나온 자려의 발언에 힌트가 있다. 


 자려가 문에 기대어 말했다. “위대하구나! 만물의 만듦이여! 또 그대(자래)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려고 하는가?”

-      강신주의 장자수업 (강신주, EBS Books, 2권, p70)


 자려는 죽어가는 자래를 만나러 와서 슬퍼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문가에 기대어 위와 같이 말한다. 죽어가는 친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며 그러한 변화를 위대하다고 찬탄한다. '자래 그대가 죽으면 만물의 만듦은 그대를 무엇으로 변하게 할까? 쥐의 간이 될까? 벌레의 다리가 될까?' 얼핏 보면 너무나 비약이 크다. 사람과 너무나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직도 당신은 사람이 죽었으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다. 여러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때로는 벌레나 쥐가 먹기도 한다. 벌레나 쥐가 먹으면 그것이 어디로 가겠는가? 벌레나 쥐의 몸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닭을 먹고 돼지를 먹고 소를 먹으면 우리 몸에서 흡수되어 에너지로 소모되기도 하고 단백질은 흡수되어 우리 몸을 이루는 단백질이 된다.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고기는 대부분 단백질이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우리 몸에 흡수된다. 아미노산은 다시 우리 몸 속에서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조립되어 단백질이 된다. 단백질은 우리 몸을 이루고 각종 효소를 만들어 신체 활동을 하게 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모두 외부에서 흡수되어 사용된 것이다. 우리 몸의 시작은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수정란, 고작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 몸은 그냥 외부에서 온 것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러니 나를 이루고 있는 이것들이 ‘원래부터 나는 사람이다.’ 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 다면 그것이 다시 분해되어 그냥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 원래부터 없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있는 것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없던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이 연이어 질 뿐이다. 


 예전 '알쓸신잡'에서 소크라테스가 마셨던 산소를 내가 호흡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나온 적이 있다. 산소뿐이겠는가? 내 평생의 어느 순간 내 몸을 이루는 수많은 탄소 중 하나는 과거 공자의 몸을 이루었던 것일 수도 있고 장자의 몸에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내 일생 중 어느 순간 내 몸의 수많은 수소 중 하나는 예수의 몸에 있던 것일 수도 있고 석가의 몸에 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더 더 오래 전 티라노사우르스의 몸을 이루던 탄소일 수도 있고 삽엽충의 몸을 이루던 산소 일수도 있다. 칼을 녹여 쇳물이 되고 쇳물을 사용해 다시 호미를 만들 듯이. 

 그러니 우리의 삶처럼 죽음도 그냥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있음으로 그냥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꼽추가 된 자여로 돌아가 보자. 20대에서 40대로 변화한 것처럼 자여는 자신이 꼽추가 된 것을 그냥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변화가 일어났을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자신의 몸이 굽으면 굽는 대로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뿐이라고. 그러니 그곳에 싫고 좋음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래야만 한다.’ ‘나는 이럴 것이다.’ 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 변화는 우연의 산물이고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우연히 사람의 형체를 빌렸을 뿐이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무엇인가에 흡수되어 그 형체를 이루었을 뿐이다. 그러니 죽음의 순간 우리는 또 무엇인가로 되면 그만인 것이다. 자래가 마지막에 말한대로.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成然寐 蘧然覺, 성연매 거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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