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작 한번 해봤을 뿐이다 - 김민태
나는 화학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중년의 연구원. 여러분들의 머리속에 너드 이미지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할 듯 하다. 아무튼 내가 이과 남자로 살아온 세월이 30년쯤 되었지만 타고나기를 이과 성향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문과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
먼 먼 과거로 돌아가 바야흐로 내가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는 지극히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고딩이었다. 성적도 역사와 국어는 거의 퍼펙트였고 국영수중 수학 성적이 가장 낮았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학에 대한 공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당시 고2로 올라갈 때 문과와 이과를 선택해야 했다. 난 당연히 문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학교 프로세스상 부모와 협의 후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그날 저녁 바쁘시기 그지 없는 아버지를 마주하고 문과를 가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문과로 가고 싶습니다. 역사가 재미 있어요. 대학에서 사학과에 가고 싶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툭 던지셨다.
“거기 나오면 어디 취직할 수 있는데?”
요즘 고딩들과 달리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던 당시 고1이 그런 것을 고민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문과를 갈 거면 법학과나 경영학과를 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버지의 논리에 나의 진로는 급격히 핸들을 틀어 문과에서 이과로 유턴을 하게 된다. 이과에서 딱히 뭐를 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고 그냥 법학과와 경영학과가 싫었다. 수학보다도 더 싫었다. 최악을 피한 차악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고3까지 나의 선택은 유예되었지만 마침내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대학을 가려면 어찌 되었던 과를 선택해야 했으니까. 여기서도 내 선택은 비슷한 경로를 밟아간다. 일단 수학 싫어. 그러니 수학과와 물리학과는 탈락. 생물 관련 과는 어디 취직할지 모르겠으니 탈락. 그나마 화학 관련과가 괜찮겠네. 그런데 화학 관련 과도 너무 많다. 화학과, 화학공학과, 공업화학과 도대체 뭐가 다른 거야?
결국 화학선생님께 상담을 신청했다. 선생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일단 과 이름에 공학이라는 것이 들어가면 말 그대로 엔지니어링이고 역학의 비중이 크다고 한다. 화학공학은 뭐 쉽게 생각해서 플랜트 짓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나? 역학이라니? 역학이라니!! 그거 다 수학이잖아. 뭔가 수렁에 빠질 뻔 했다. 그래서 화학과 당첨. 그렇다 내 전공은 이렇게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결정되었다. 그냥 수학이 싫어서 수학을 별로 안 해도 되는 과 중에서 그나마 취직 될 만한 과를 찾다 보니 화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일 뿐이다.
뭔가 화학을 사랑하는 연구에 미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상상했던 분들에게는 조금 허망한 이야기일 듯 하다. 그런데 조금 슬픈 뒷이야기를 하자면 화학과에서도 수학은 필수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깨닫게 되었다. 이공계에서 수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공돌이들에게 수학은 계산이 아닌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해석하는 언어.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기실 것이다. 결국 4년 내내 수학에 시달렸을 텐데 어쩌다 연구원이 된 것일까? 연구원이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대학원까지 가서 얼마간 연구 경력을 쌓았다는 것이니까. 그렇다 대학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간다는 대학원에 가서 또 몇 년간 죽어라 공부를 했다. 그 이유는 화학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너무 넓은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내가 싫어하는 물리화학과 무기화학도 있었지만 나를 매혹시킨 유기화학과 생화학, 고분자 화학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이 되어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이다.
난 광화학이라는 조금 특이한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연구주제에 큰 흥미를 못 느꼈는데 다행히도 좋은 지도교수님을 만나서 연구주제를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광화학을 연구한 것은 1년 반 남짓한 기간뿐 이었다. 나는 새로운 연구주제인 고분자로 최종 학위를 받았고 이 연구 실적으로 전자회사에 입사했다. 내가 연구한 고분자가 디스플레이에 적용되는 물질이었기 때문에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는 전자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 회사에서 입사하고 6개월만에 공정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고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 동안 화학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은 재미없었고 나는 점점 지쳐만 갔다. 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 비슷한 상황에 있던 한 동료가 자신의 상사가 해준 충고를 들려주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맡았을 때 기존의 내 전공과 경력을 버리고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력 위에 새로운 경력을 쌓아 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추가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머리로는 공감하였지만 나에게 그리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내가 화학회사로 이직한 후 팀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였다. 당시 내가 화학회사로 이직해서 맡은 연구 분야는 나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그래서 우리 팀장님은 나의 어떤 능력을 보고 뽑으신 것일까 궁금해 했더니 한 동료가 팀장님께 들은 뒷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때 우리가 감광성 고분자를 연구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김책임 지도교수님이 우리나라 광화학의 대가시더라고. 거기에 전자회사에서 맡은 공정에 사용되는 고분자가 우리가 연구하는 고분자랑 같지 않겠어? 팀장님이 생각하시기에 이 사람이다 싶었던 거지.”
아하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나에게 있어 광화학의 경험도 전자회사의 고분자 관련 경험도 별개의 경험이었다. 나에게 있어 별개의 경험으로 인식되던 것들이 연결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유니크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진 경쟁력이 되어 다른 많은 경쟁자 대신 내가 선택되는 이유가 되었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나는 고작 한번 해 봤을 뿐이다.” 라는 책에는 점들의 연결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에 뿌려진 무수한 점들 이 점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현재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교 연설을 한번 살펴보자.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아시다시피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창업주이고 애플을 지금의 모습,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여정을 보자면 애플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쭉 뻗은 길 위를 달려온 것이 아니라 매우 삐뚤 빼뚤 굽어진 길을 걸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양부모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퇴를 한다. 그리고 애플을 창업하여 성장시키지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다. 그는 스탠포드 연설문에서 강조한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이어져 현재의 성공한 자신이 되었다고. 중퇴를 하지 않았다면 캘러그래피를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아름다운 서체를 컴퓨터에 적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내가 지나온 과거들이 그 당시에는 어디로 연결하고자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은 것들이 현재에 이르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이어져 결국 현재의 내가 된다고.
그가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픽사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대주주가 되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경험들을 가지고 다시 애플에 복귀했을 때 그는 더욱 성장했고 애플 또한 달라졌다. 혁신적 기술만을 자랑하던 애플이 누구나 갖고 싶은 디자인의 애플로 바뀌었다.
내 인생을 스티브 잡스 같은 거물과 비교한 다는 것이 우습지만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지 않은가? 순간 순간 선택을 했고 당시에는 큰 의미가 없던 것들이 하나씩 이어져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다. 그처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러 저러한 것들이 지금은 잘 보이지도 않는 점으로 흩뿌려져 있더라도 미래의 나에게로 연결되어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다. 그러니 별거 아닌 것이라도 일단 주저하지 말고 시도해 보시라.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시작된 것이 어쩌다 보니 놀랄 만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수학이 싫어요.” 에서 시작된 내 인생 여정이 문학소년을 연구원으로 바꾼 것처럼. 전혀 상관없는 광화학과 고분자의 경험이 합쳐져서 감광성 고분자 전문가가 된 것처럼. 대학 중퇴 후 그냥 호기심에 시작한 캘러그래피가 애플의 차별화를 만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