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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 회사원 김씨 Jan 29. 2024

현재의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더라도

사는데 정답이 어딨어? - 대니얼 클라인

사진출처 : 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그날도 회사 도서관에 새로 나온 책이 없나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범상치 않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썬글라스를 낀 할아버지가 썬베드에 누워있다. 한 손에는 빨대가 꽂힌 음료수 잔을 들고 있다. 옆에는 읽던 책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자연스레 눈은 제목을 찾아간다.


“사는데 정답이 어딨어?” 

사진출처 : 교보문고


딱 내 스타일이다!

 저자는 80세를 바라보는 철학자다. 이 책은 그가 젊은 시절 철학책을 뒤적이며 정리한 명언들에 대한 주석이다. 저자가 철학책을 뒤적인 것도 철학을 공부한 것도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찾는 이유와 거의 유사하다.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사람은 말한다. 철학은 인간의 학문이라고. 즉 인간의 삶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 학문이라고.

철학이 아주 오래된 학문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과거의 사람들을 괴롭혔던 문제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철학책들을 뒤적여 왔다. 내가 책 읽기를 멈추지 못한 것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노철학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렇다. 저자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답 따위는 없다고. 


 “부조리주의는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이상적인 방식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 사이의 부조화에서 나온다.”


우리가 고민할수록 우리는 삶의 의미와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 이 얼마나 슬픈 역설인가.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원이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무시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의 시야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끝이 없다. “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어렵게 하는 독일철학자 중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끝판왕이다. 저자의 친절한 해설이 없었다면 독일 철학자 앞에 또 한번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첫 소절은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말로 설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고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뒤에 나오는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모두 현재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머물러 있다. 매 순간이 현재이고 그 현재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현재를 사는 것은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언제나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한다. 언제나 현재이고 현재가 전부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현재를 충실히 살 수 있을까?


 “숙고하지 않는 삶은 분명 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살아보지 않은 삶을 숙고할 가치가 있을까?”

- 애덤 필립스-


저자는 현재의 내 삶에 집중하라고 한다. 현재의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더라도.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 여기’를 외면 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른 선택을 상상하느라 현재를 외면한다.”


 저자는 “만약 ~라면?” 같은 가정법 놀이를 멈추라고 한다. 우리는 가끔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만약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삶”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과연 이런 삶을 숙고할 가치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러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숙고하지 않는 삶이 더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내가 살아 본적도 없는 상상 속의 삶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닌 나를 꿈꾼다. 수많은 ‘만약에’는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틈만 나면 만약에 놀이에 빠져든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곳에 나는 없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 만이 실제 존재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토록 찾는 의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렸을 때는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가을’ 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어떤 계절이 더 좋고 어떤 계절이 싫다고 이야기 하기 어려워 졌다.

 

 “봄은 갖가지 꽃이 피어 좋고, 가을은 둥근 달이 있어 좋고

여름은 시원한 바람불어 좋고, 겨울은 눈 내려 좋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무문혜개 선사-


 나는 여전히 한여름의 더위를 싫어하지만 짙푸른 나무의 색과 그늘에서 맛보는 시원한 바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눈싸움을 하지는 않지만 눈 내리는 회사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맑은 날은 좋고 비 오는 날은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은 것이다. 삶에도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도 있다. 마흔이 넘어서야 흐린 날을 안 좋은 날이 아닌 그냥 흐린 날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어서야 나에게 주어진 모든 날을 조바심 내지 않고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다 나의 날이었다. 


 그렇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이 삶 말고 다른 삶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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