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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럿Pallet Mar 23. 2020

100% 남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자작 단편소설 #031001

100% 남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1-
25분이나 지났을까. 전철은 숨도 고르지 않고 달려와서는 또 사람들을 태운다. 지하철은 생각보다는 한산했고 사람들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지친 사람들로 전철 안은 만원이었을 것이다.
난 문에 기대어 창에 비치는 풍경과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 둘러싼, 낯설지만 익숙한 그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번 쳐다보기가 무섭게 경계하는 표정들 속에서 난 시선을 다시 창문으로 돌려야 했다. 그러던 중에 창에 비친 낯익은 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 시간 즈음이 되면 전철에서 으레 마주치는 그 사람이었다. 항상 수수한 옷을 입고 로션도 바르지 않아 튼 얼굴에 비누냄새를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사소함들이, 전철 안의 사람들이나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전철 창문을 통해 조금씩 그를 주시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다행히 나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전철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차고 난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다시 눈을 열심히 돌려가며 그를 찾아내려 했으나,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린 그를 찾기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난 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며칠 후면 또 마주칠 일상의 한 사람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이 인파를 또 지나쳤다.
전철은 어느새 내가 내릴 역까지 날 데려다 놓았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 그 사람이 나를 통과한 듯한 묘한 느낌에 빠졌다.
사방이 어둑하고 아파트 계단 또한 그러하다. 불 꺼진 집 앞에 서서 열쇠를 뒤지며 또다시 뻔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현관 등을 생각한다. 그 녀석은 문을 열면 반짝 켜지면서 날 놀라게 할 것이다. 난 그 장단에 놀라는 척하면서 신발을 벚어젖혀야 할 것이고, 다시 꺼지는 불에 적막한 오늘 하루를 반성할 것이다.
문을 열었다. 센서가 고장 났는지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은 반성만 하라는 이야긴지. 무심한 어둠을 향해 몇 걸음 더듬거리다가 현관 스위치를 눌렀다. 정전인지 방안의 아무도 대답도 반응도 없다. 다만 건전지 전자시계가 빨갛게 8시 13분이라고 알리고 있었을 뿐이다.
'어제는 12분에 도착했는데'
내겐 어느 순간부터 8시 15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어떤 규범처럼 정해져 버렸다. 15분은 내겐 어떤 정점이다. 일일드라마를 보기 전에 준비하는 시간으로도 적합하고, 저녁을 먹기에 적정한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구차한 이유들보다도 어떤 막연한 느낌이 이미 내겐 큰 의미처럼 굳혀져 버렸고, 이젠 내게 있어서 무엇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매 시의 15분이다라는 것은 명제가 되었다.
"띠리리링~"
때아닌 전화 벨소리. 오랜만이긴 하지만 달갑진 않았다. 그저, 정전이 되어도 왜 전화는 나가지 않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여보세요?」
「남진영씨 되시죠?」
「예, 맞는데요.」
「여기 미리네 책방인데요, 어제 빌리신 책이요, 내일까지 반납 가능한가요?」
「아..예. 지금 가져다 드릴 수도 있는데요.」
「그러실 수 있나요?」
「예, 그런데 왜 그러시죠?」
「지금 그 책을 급하게 빌리려는 분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드렸네요.」
「아. 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가져가겠습니다.」
「예」
책상을 더듬거려 그 책을 찾았다. 방금 들어온 터라, 그 차림 그대로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 앞에 다다르자 카운터에 꼬마가 서성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여기 책이요.」
내가 책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 꼬마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전화번호는?」
「4792요.」
꼬마는 익숙하게 책을 빌려서 내 앞을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 책은 꼬마가 읽기에는 적합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에 꼬마가 골목을 돌아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난 그 꼬마에게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저 꼬마 여기 자주 오나요?」
마치 탐문수사를 하듯 물었다.
「가끔 오죠, 잊힐만하면 오더라고요. 근데 그건 왜요?」
「아..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이것이 그 책의 제목이다. 유치하면서도 앙증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들 앞에서 읽기엔 영 낯부끄러운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 꼬마도 그런 이유로 그렇게 빨리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아한 일이었다. 10살도 안돼 보이는 꼬마 녀석이『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는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날 이후로도 계속 꼬마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퇴근할 때 익숙한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도 사라졌고 오로지 그 꼬마는 왜 그 책을 빌려야만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사실 따져놓고 보면 누구 하나 그 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그 누구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었는데, 동네에 어떤 꼬마가 그 책을 빌리더란 말이야. 대체 그 꼬마는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빌렸을까? 왜 그런 책을 읽을까? 꼬마가 그런 책을 읽어도 될까? 분명 집안에 어른이 빌려오라고 시켰겠지? 설마 초등학교에서 그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숙제로 내라고 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렇지?」
아마 이렇게 말한다면 다들 나를 미친 사람 아니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난 그 꼬마가 책을 반납하는 날일 것이라 추정되는 그 날로부터 이틀의 앞뒤로 그 책방 주변을 서성였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꼬마가 저녁시간에만 책을 반납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난 용기 있게 책방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불렀다.
「저기요. 말씀 좀 물게요. 지난번에 제가 빌려갔던 책 빌려간 꼬마요, 혹시 안 왔어요?」
「어떤 꼬마요?」
「있잖아요, 제가 빌려갔는데 연체해가지고 다시 가져왔는데 어떤 꼬마가 쏜살같이 그 책 빌려서 가져갔잖아요. 나흘도 안 지난 일인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근데 그 책은 왜요?」
「제가 그 책에 중요한 걸 끼워 놓았는데 깜빡하고 반납할 때 그걸 빼지 않았거든요.」
책방 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 책 제목이 뭔데요?」
「아..」
이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내가 한 거짓말로 결국 그 부끄러운 책 제목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 책 제목이 뭐냐고요?」
주인의 목소리는 점점 내 귀를 크게 울려오고 있었다.
「저... 잊어버렸어요.」
「예?」
주인은 정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뭔가 안돼 보인다는 표정 같기도 했고 애석한 표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 이상 해명하기도 애매한 순간이었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책 제목이 이래요! 한심한가요? 한심한 얼굴을 한 사람이 한심한 책만 읽는다구요? 그렇게 말하려고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혀끝에서 달랑달랑 매달려 있건만 막상 나오는 말은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를 더욱 바보로 만들어 주는 굳건한 한마디였다. 그렇게 책방을 터벅터벅 나와서 집으로 향하면서 이젠 그 꼬마와 그 책과 이 책방을 잊으리라 그렇게 다짐을 했다.

-2-
나의 다짐은 생각보다 매우 잘 이루어졌다. 나의 생활은 예전처럼 돌아왔고 꼬마도 책도 거의 잊힐 정도로 난 잘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그를 다시 찾는 버릇도 돌아왔고, 8시 15분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습관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익숙한 시간의 그를 지하철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는 것. 그 정도의 안타까움을 빼면 난 상당히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전철 교량 검사를 이유로 전철 운행이 부분 중단되고 대신 30분은 더 돌아가야 할 버스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끊긴 전철 때문에 많은 퇴근 인파가 줄지어 있었다. 이 인파가 하루 이틀 겪는 군중이 아닌데도 오늘의 그들은 무엇인지 의심하는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항상 느껴지던 여유로운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무표정의 인파를 비집고 앞으로 나가는데 생기가 도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바로 그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였기에 나도 모르게 그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의 웃음과 마주치더니 잠깐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아닌가. 나의 실수였고, 또 한 번 나의 바보 같은 행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왔다. 난 동전을 꺼내 들고 있는데 그가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내가 타려던 그 버스였다. 버스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난 약간 서성이다가 그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들어차자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그 책이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잊힌 잠재의식 속에 내가 깨어났다. 그 꼬마도, 책방 주인도 그 상황들. 정전으로 시작된 지워진 기억들이 다시 불을 끄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들로 지금의 상황이 나빠질 것은 없었다.
내 인연의 끈의 어느 중간에 질질 끌려다니는 그 책을 이젠 펼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책은 어쩌면 내게『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제목 같은 지침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그 책을 몇 페이지 읽더니 싱긋 웃었다. 재미있는 모양이다. 난 그 책을 읽을 때의 기억이 사라진 것인지 그 책을 읽긴 읽었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책의 줄거리를 애써 기억해보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100%라는 것을 믿지 않는 나의 두려움 때문일까.
100%의 벅찬 기분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 벅찬 기분이 100%이었다가도 그 사람을 알아가면서 100% 이상으로 발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두 사람이 합해서 100%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모래시계처럼 아래쪽으로 가득 채워져 0%가 된 사람이, 자기가 다 쏟아낸 100%의 모습을 한 사람을 보면 빠져버리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그런 부질없고 상처만 가득한 인연이 되는 것보다 나의 모래시계를 뒤집어 줄 수 있는 '만남'을 갖는다는 것. 나에겐 그러한 만남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만남의 순간은 연속된 시간(時間)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가져다준다. 그 시각(時刻)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지만 0.1초의 순간에도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내면의 톱니들은 또 다른 조합과 공식을 만들어낸다. 이 묘한 흥분은 '인연', '사랑' 등의 단어로는 설명되지 못할 그 어떤 무엇이다.
잠시 시선을 놓쳤던 나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가방 속에서 무엇을 꺼낸다. 세상에. 매우 놀라운 물건이 나왔다. 딸기우유였다. 세상의 수많은 맛 중에 딸기맛 우유라니. 그것도 책만 가득할 것 같은 저런 스마트한 가방에서 고작 나온다는 것이 분홍색 빛이 감도는 딸기우유라니.
「저기요... 우유 좋아하시나요? 왜 하필이면 딸기우유죠? 하고많은 우유 중에서 왜 딸기 우유를 드시나요? 오늘만 그렇게 드시는 건가요? 아님 누가 사준 건가요? 그 책 제목의 기분을 느끼려고 그러시는 건가 보죠?」
적어도 난 그렇게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그런 나의 욕구를 그저 눈빛으로 강렬하게 쏟아 부는데 그쳤다. 강렬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저 내가 모르는 어떤 한 인간에게 당신은 지금 뭔가 당신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어요 라고 말해주는 것 자체가 중요했으니까.
그가 나를 돌아봤다. 0.3초나 봤던 것 같다. 아주 자세하게 생각난다. 그는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시선을 내 눈에 조준했다. 그것이 0.1초 정도 걸렸다. 그리고 0.1초 동안 나의 행동을 살피고 나머지 0.1초 동안은 다시 시선을 둘 곳을 찾아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0.2초 동안 준비를 했고 시선을 돌리는 0.1초에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밍이 맞질 않아 그렇게 됐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아니다. 그는 분명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는 기분이란 참 당혹스럽고, 쑥스럽지 않을지.
그는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도 종종 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집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주위에서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할 모습을 한 사람들을 보면 눈만 책을 읽곤 했다. 그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날 시험에 들게 하였다. 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내게 온 문자들을 다시 확인했다. 4개의 문자가 초라하게 날 보고 있었다. 마지막 문자는 '너 왜 그러고 있니?'라고 온 문자였다. 누군가 번호를 잘못 찍어서 보낸 문자였지만 잘못 온 게 아닌 것 같아서 한 달째 수신함에서 삭제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거의 다가서고 있었다. 순간 그가 급하게 밸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선 자리에는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됐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딸기우유라는 익숙하지만 낯선 조합을 한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단 몇 걸음도 내딛지 않는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다시 자리로 와서 핸드폰을 들었다. 난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웃음을 다시 보냈다. 그는 날 얼핏 보더니 성급하게 내렸다. 한 정거장 전이구나. 이 정도면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았는걸. 하면서 나도 버스에서 내렸다.
불현듯 내가 왜 그를 관찰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책과 딸기우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다. 전혀 새롭지 않고 마음을 들뜨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내가 자주 마주치는 퇴근길의 인파에서 눈에 뜨인 한 사람일 뿐이다. 내가 눈을 돌리면 그보다 더 많은 낯익은 얼굴들이 나를 낯설어하고 있을 텐데.
'왜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일까'.



-3-
전철 교량 검사로 인한 시일이 지나는 동안 그를 매일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볼 수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은 손에 쥐어 있지 않았고 딸기우유를 먹는 일도 없었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와 딸기우유는 우연히 엮어진 그 날의 조합이었던 같다. 그러나 난 그가 생각지도 않을 이 조합에 대해 여전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딸기우유, 꼬마. 그
왠지 어울리는 조합이다. 끝에 '그'를 뺀다면.
-그는 더 이상 나의 관심의 카테고리 안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
버스정류장에서의 우연치 않은 만남은 그와 우연히 이야기할 기회를 엮었다.
「저.. 무거울 것 같은데 가방 주시겠어요.」
난 단지 웃으며 앉아있는 그에게 가방을 주었다. 가방을 받아 든 그는
「가방이 꽤 묵직한데요.」
하면서 웃었다. 난 여전히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또 내게 말을 건다.
「저.. 자주 보네요.」
「... 그러세요? 전.. 잘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나를 스쳐간 그를 이번엔 내가 스쳐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매일 제가 이 자리에 앉고 이쪽에 서 있으셨는데...」
약간은 어색한 웃음으로 그는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했다.
「저.. 괜찮다면 말동무했으면 하네요. 말없이 혼자 가기엔 지루한 길이잖아요.」
난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한마디를 던졌다.
「딸기우유 좋아하세요?」
「네?」
그는 정말로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당황한다기보다 순간적으로 나에 대한 이미지 조합 퍼즐을 다시 짜 맞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그 눈빛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죠?」
모르겠다.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책에 대해서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차라리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 읽으셨죠? 왜 하필 그 책을 선택하셨나요? 당신도 저처럼 그 책의 제목을 믿을 수 없었나요? 아니면 어떤 이유로 고르신 거죠?」
라고 말하는 게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알고 싶어서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예.. 글쎄요. 즐기진 않네요. 근데 그러면 이제 말동무하는 건가요?」
「...」
내가 말을 못 하고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깔아 두자, 그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하였다. 나의 모래시계는 여전히 0%의 비워진 상태였다. 그와의 만남은 비워진 나의 모래시계 위를 채우지 못했다. -적어도 만남의 시각(時刻). 그 정점(停點)은 그랬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딸기우유, 꼬마.
한동안 그는 내게 그의 일상을 조금씩 이야기로 내놓았다. 난 웃음으로 일관했다. 내가 한 말은 딸기우유 좋아하냐는 말과 알고 싶다는 말. 두 마디뿐이었는데 그는 서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버스정류장이 다가오자 그가 내게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난 말했다.
「글쎄요. 그냥 남자라는 것밖엔 알려드릴 수 없네요.」
「그럼요. 그쪽이 남자분이시라는 거 저도 알아요. 저는 여자잖아요.」
그는 슬며시 미소를 띤 채,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었다.
난 지금까지 어느 순간에도 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다. 생각의 겨를 없이 말하는 것.
「100% 남자아이라는 것밖엔 알려드릴 수 없네요.」
「예?」
「그쪽이 생각한 저의 인상이 100% 만족되는 남자아인 아니겠지만 성(性)으로는 100% 남자아이죠.」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100%의 남자아이여서가 아니라 100% 남자아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맞다. 그랬던 것 같다. 내가 갖고 있었던 익숙한 낯섦. 그 느낌은 아마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버스는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여전히 익숙했다.

-끝-
→ 소설 속에 나오는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라는 책은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입니다.


작 중의 화자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보면, 마지막에 여자임을 알게 되며 반전되는 재미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설명이 다소 친절한(?) 면이 있어 아쉽긴 하지만, 도서관 정보화 교육실 PC에 앉아서 2시간 동안 타자를 치며 적다가 PC가 멈춰서 다 날려먹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다시 처음부터 2시간 정도 썼다. 이 소설은 나의 처녀작이자, 20대의 마지막 작품으로 마무리되었다. 30대 후반의 지금. 우연히 싸이월드를 열었다가 발견한 이 글을 정리하다 보니 참 반갑고, 20대의 내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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