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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럿Pallet Aug 19. 2018

등산하는 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안(慰安)에 대해

'눈이 떠진다'의 의미

중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의 여러 말과 행동, 습관 중에서 놀랍다고 여겨졌던 부분들이 한두 가지 정도씩은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늦잠 한 번 없이 일찍 일어나셔서 출근 준비를 하시고, 도시락을 싸 주시고, 나를 깨우시는 모습이다.

피곤하실 법도 한데, 아주 일찍 주무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매번 일찍 일어나실 수 있을까.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눈이 떠진다'였다. 그 시절, 그 나이에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난 소풍이나 수학여행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인데..

아, 알았다.

요즘 들어 새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눈이 떠진다는 것은 습관으로 고착된 행동이지만, 습관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다르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중심에 '학년 과정'과 '일과시간표'만 있었다. 공부에 재미를 느꼈더라면 좀 달랐을 텐데..

그리고 지금은 내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있고, 내가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진다.


내가 시작하는 아침

난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보통의 주말이라면 배게 맡에 둔 휴대폰을 열어 웹서핑을 하거나, 일어나서 물 한 잔 하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겠지만, 오늘은 하늘이 높고, 구름도 적당하고, 바람도 시원하다.

좀 다른 시작을 해 볼까.

오랜만에 재래시장에 갔다가, 등산복 할인 코너에서 1+1으로 산 여름 등산복이 밤새 잘 말랐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등산 백팩을 꺼냈다.

손수건 한 장도 챙긴다. 세모로 접고 둘둘 돌려서 보이스카웃 하는 학생처럼 목에도 둘러보고, 라멘집 장인처럼 머리에도 둘러본다. 오늘은 라멘집 장인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보온병에 시원한 보리차도 한 병 챙기고, 여행용 화장지, 물티슈, 그리고 어제 아내가 만들어 놓은 컵케익 두 개를 위생비닐봉지에 넣어 백팩에 담았다.

등산복을 갖춰 입고 연애시절 아내에게 선물 받은 등산화도 꺼냈다.

그동안은 가벼운 등산엔 등산화를 신지 않아 등산화가 오랜 기간 좌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에서야 이 녀석도 긴 수행을 마무리하고, 흙과 돌과 바람을 만나러 간다.


등산

등산로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등산에 늦은 시간일까? 이미 많은 분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르는 길에 스쳐가는 등산객들과 바람. 그 닿지 않는 부딪힘에는,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상쾌함이 있다.

솔나무 향이 나는 바람.

산에서 듣지 못하면 서운한 산새들과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 그리고 할배들의 휴대용 라디오 소리.

사람 구경이 처음도 아닐 텐데 매번 눈앞에 달려드는 날벌레들.

그러다가

사발면이나 막걸리 냄새가 슬슬 풍겨오기 시작하면,

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거의 정상에 다 왔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기 마련이다.

역시 정상이었다.

정상 이 곳 저곳에 삼삼오오, 또는 홀로 앉아 있는 사람들.

요즘은 강아지들도 등산을 많이 하네.


'산'이 주는 선물을 피해 가는 사람들

산을 즐기는 이들을 보면 정상에 오는 성취감이 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산을 즐기러 오는 것 같지 않아 아쉽다. 그들은 산이 주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눈 안에 담기는 그림 같은 모든 장면들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는 것 같다. 주로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 화장 안 한 자기 얼굴을 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니면 친구들과 수다를 즐기느라 주변을 눈에 담지 않는다. 또는 휴대폰 앱에 올라가는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 민소매 티 사이로 단련된 팔근육을 보여주고, 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로 달린다. 향수인지 화장품인지 모르겠지만 진한 도시의 향기를 풍기며 말이지.

뭐랄까 마치 산 조차도 도시가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안

아재 같고, 꼰대 같지만 산이 주는 선물을 피해 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온전히 즐겼다 가요.


모든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목적만 남게 된다. '만족'도 '목적'에 기준해서 생기다 보니, 그렇게 접근하면 무엇을 시작해도, 어떤 공간에 가게 되더라도 목적이나 트렌드가 지나가면 쉽게 흥미를 잃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산'도 SNS에 인증하기 위한 장소나 과정이 되고, 그곳에 오르는 내 자체보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대로 나를 봐주길 원하는 주변 시선에만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골이 주는 위안을 알고 있다. 그리고 소울메이트 같은 친구와 가족이 주는 위안을 알고 있다. 그 위안에는 '목적'이 없다. 그 공간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절이 지나고 흐름이 바뀌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다. 나에게 의미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라는 인식. 그 인식을 평소에 접하는 모든 것에 퍼트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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