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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럿Pallet Sep 02. 2020

코로나19가 선사한 점심

함박스테이크 편

코로나19가 우리 가족에게 선사한 점심 일상

코로나19의 위협으로 나의 재택근무도 함께 길어지고 있다.

재택근무가 나에게 준 선물 하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점심이다. 딸내미도 학교를 통 못 가고 집에서 원격 수업만 듣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면 재밌는 일상이 벌어진다.

아내가 "점심 먹자"라는 말이 떨어지면 나는 끝 방에서 딸은 중간 방에서 문을 척 열고 성큼성큼 나온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딸내미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하고, 나는 반찬과 물을 준비한다. 아내는 준비된 요리를 식탁으로 옮기고 앉는다. 그러면 딸내미는 "잘 먹겠"이라고 말하고, 나와 아내는 "습니다"라고 말하며 숟가락을 든다.

이것이 나의 점심 일상인데, 오늘은 아내가 특별한 점심을 준비했다.


아내의 비장의 요리

가끔씩 선보이는 이 요리는 한 번 맛본 사람이라면 절대 남기는 법이 없다.

딸아이의 친구 중에 편식으로 유명하고, 채소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 역시 소스 몇 방울만 남기고 다 해치웠다는 전설의 요리. 바로, 함박 스테이크!

사진에 조예가 깊지 못하여, 맛있게 찍은 사진이 없네...

어떤 맛인지, 내가 느꼈던 맛을 묘사해 볼까.

 달궈진 주물 프라이팬에서 겉은 바삭하게 살짝 타고, 안은 보드랍게 그 육즙을 챙기고 있던 함박 스테이크. 씹기 시작할 때는 마치 샤오롱바오가 터지는듯한 식감에 놀라고, 몇 번 씹지 않아도 녹아들듯이 퍼지는 육질은 아이들이 싫어할 수 없는 맛이다.


고기도 고기지만, 아내만의 특제소스로 버무린 함박스테이크는 다른 어떤 가게에서 먹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진한 풍미와 묵직한 단맛과 녹진한 버터의 향미가 입안에 꽤 오래 퍼진다. 소스의 진한 맛을 조금 진정시키고 싶다면 접시에 함께 올린 반숙 계란 프라이의 그 탱글한 노른자를 살짝 터뜨리자. 그리고 퍼져 나오는 노른자와 소스의 마블링을 잠시 눈으로 즐기고 고기 위로 섞어 얹어서 입에 쏙! 엄지가 자동으로 척 올라오는 맛.


함께 먹는 숙주나물 무침은 고기의 보들부들한 식감으로 아쉬워진 아삭함을 채워 넣는다. 이보다 조화로운 맛이 있었던가, 잠시 과거에 먹었던 음식의 기억들이 지워지고, 입안에 채워지는 맛의 향연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 정도로 함박스테이크의 맛을 느꼈다면, 밥을 한 숟가락 떠서 같이 오물거리자. 밥알과 함박스테이크가 잘 뒤섞이면 왜 이 정도의 진한 맛이 필요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놀라운 맛의 레시피는?

레시피는 모른다. 아내는 요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고, 주방을 양보하지 않는 편이다. 알고 싶다고 청하면 알려는 주겠지만, 맛있다고 해도 레시피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혹시 내가 더 맛있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내는 내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요리를 하려고 들면, 약 5년 전에 요리하면서 잘 몰라서 이것저것 물어봤던 시절의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는데도 요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그 이야길 꺼내는 걸 보면 아마도 내가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내 요리가 아내에게 꽤 위협적이어서가 아닐까.


어디에서 온 요리니?

함박스테이크에서 '함박'이 함박웃음을 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예상할 수 있듯이 이 단어는 영어 발음이 쉽지 않은 일본에서 들어왔단다.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의 '햄버그'가 일본에선 '함바구'라고 발음되다 보니, 이 단어와 함께 요리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그대로 정착되었다.

이탈리안부터 하와이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함박스테이크

70년대 경양식으로 들어온 이 요리에 과연 국경이 있을까. 독일 요리인지, 몽골의 조리법인지, 중국의 레시피인지, 일본의 요리인지, 한국의 요리인지 알 수가 없는 요리. 그래서 어떤 맛이 정말 정통한 맛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고, 원조를 따지는 경우도 거의 없는 요리. 학교 구내식당이나, 분식점, 70년대 경양식을 표방하는 뉴트로 느낌의 음식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팔 법한 그런 요리. 딱히 고급지지도 않고, 딱히 격이 떨어지지도 않는 그런 요리.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요리. 함박 스테이크.


그 애매한 어딘가에 있는 요리라서, 평소엔 잘 생각나지 않는 요리지만, 아내가 한 번씩 만들어주면 행복한 요리.


코로나19가 일상의 많은 소중함을 빼앗아가기도 했지만, 반대로 지나쳤던 일상의 한 모습도 오롯이 볼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의미 부여도 할 필요 없었던 하나하나가 특별해지는 요즘. 아내가 해 주는 점심 한 끼. 딸내미와 함께 하는 놀이 하나조차 참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내일은 또 어떤 점심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의미가 나에게 가까이 올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집 안에서만 보내는 하루를 다시 스트레칭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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