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이었던 '만약에'에 잠시나마 탑승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우리 집은 30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다. 한 층에 10세대가 오밀조밀 모인 낡은 아파트. 그러니 '그 일'이 일어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아주 필연적이었을 일. 기어이 내게 생기고 만 일. 사실은 나에게 없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구축에 사는 친구들부터 온라인 속 거주자들까지 인맥을 끌어모아 물어보고 대부분 없었다는 말에 안심을 했던 바로 그 일.
바퀴벌레의 등장이었다.
한때 유행이었던, "엄마,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아, 유행이라고 냉큼 탑승해서 나에게 애정을 주던 사람들에게 그 질문을 던져댔던 과거의 나를 매우 반성한다. 어떻게 할 거냐고? 엄마, 빨리 방역 전문가 불러....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그랬다. 내 계획에 그놈들은 없었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어렵다.
처음은 에어컨 설치하겠다고 베란다와 현관문을 활짝 열었던 그날이었다. 아, 그날. 나의 운수 좋은 날.
조금 엉망으로 소통했던 에어컨 업체에게 예약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정말 친절한 기사님을 바로 만날 수 있었고, 그 기사님이 예약금 오만 원까지 받아내주셨던 운수 좋은 날,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그놈이 들어왔다. 기사님께서 씻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주신 필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데 바닥에 까맣고 큰 무언가가 있었다.
"기사님, 죄송한데... 혹시 바퀴벌레 잡으실 수 있어요?"
기사님은 멋있었다. 화장실 슬리퍼로 내려치고 휴지로 감싸서 변기까지 깔끔한 처리를 해 주시며 든든한 말도 해 주셨다.
"딱 보니 외부유입이네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정말 다행인 건, 짝꿍은 집에 갔어도 혈육이 사정상 열흘 정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이었다. 큰 놈은 외부 유입이라는 검색 결과에도 불안했던 나는 바로 다음 날 방역 업체를 불렀고, 독먹이겔을 뿌리자마자 쌀알보다 작은 갈색점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 느낌이 쎄한데...."
나를 울리기 충분한 사장님의 한마디.
"이거는 독일놈이라 집에서 서식해요."
저는 저 혼자 살려고 월세를 내는데 왜 저놈들이 호의호식할 계획을 세우는 거죠...?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우울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집에서 움직일 때마다 동공은 수백 번 떨리고, 머리카락 한 가닥에도 놀란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집이 무서워졌다. 집에 혼자 들어갈 수 없었고, 며칠째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니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열이 나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등 신체적 증상도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누군가 첫 독립이 어떻냐고 물어보거나 집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전에 코가 시큰해지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집주인에게 바퀴벌레가 며칠째 나온다고 말하니 같은 해에 지어진 본인 집에서는 안 나오는데 이상하다는 말뿐이었다. 세상에 내 편은 없었다.
자취 사나흘 차에 만난 그놈들은 지독한 우울증과 불안, 공포만 남게 했다. 심지어 새끼들만 나오다 보니 언젠가는 다 자란 놈을 마주치게 될 거라는 부푼 상상도 나를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주말에 와 주겠다는 짝꿍의 말에 왕복 두 시간 넘는 출퇴근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매달렸다. 그때까지만 함께해 달라고....
그렇게 동생과 함께하는 열흘 내내 무려 4kg 넘게 감량을 성공했다. 식단과 운동으로도 안 되던 게 이렇게나 쉽고 빠르게.... 그리고 얼굴의 명암도와 채도 낮추기도 훌륭하게 성공했다.
이게 자취의 맛인가요? 이렇게 삼키지도 못하게 쓰고, 속이 쓰리도록 매운 게?
보이지 않는 공포와 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하는 독립에서, 처음 치루는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