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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강 Nov 15. 2024

운이 좋았던 해외생활

모래시계 뒤집기

 곧 떠난다는 말이 삼수딘이 나를 믿고 따르게 만들었다면, 창고에서의 내 시간이 하루씩 길어질수록 삼수딘의 충성심이 조금씩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판을 뒤집을 힘을 키워야 한다.


 업무를 파악하면서 창고의 특이점을 알게 됐다. 모든 철골은 창고로 반입되어 창고 옆 워크숍에서 제작된다. 제작이 완료된 철골은 다시 창고로 옮겨져 페인트를 칠한다. 즉 이름은 창고지만, 철골 워크숍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가 철골 작업과 페인트 작업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철골은 내 영역이 아니다. 적재가 주로 새벽이나 밤에 이뤄지기에 현장에서 숙식하는 삼수딘이 적재를 담당한다. 그리고 어찌 된 이유에선지 삼수딘은 내가 철골 적재에 관심 갖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접근이 어려웠다. 거기다 철골 제작사는 10년 넘게 회사와 거래를 해왔다. 인니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자란 신입이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다. 적의 목덜미를 물기 위해선 날카로운 이빨이 필요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은 현장의 불만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던 중 점심이 지날 무렵 현장 소장에게 연락이 왔다.     


"삼수딘 그 새끼 그거 미친 거 아니야? 기둥을 딸랑 하나 보냈네? 작업 뭐 어떻게 하라고? “


 기둥을 세우고 철골 구조물을 연결해야 하는데, 기둥이 하나다. 연결할 기둥이 없으니 작업이 안된다. 한마디로 소장님 입장에선 쓰레기만 받은 셈이다. 열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소장님은 전화로 부족해 창고로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달려오는 소장님을 본 삼수딘은 뻔뻔하다.     


"기둥은 작업한 지가 꽤 돼서 안쪽에 적재돼 있어 못 보냈습니다. 바깥쪽에 있는 것부터 보내드리고 오늘 기둥 보내려 했습니다."


 삼수딘의 말에 소장님은 더 노발대며 화를 냈고, 트레일러를 섭외해서 기둥을 바로 보내는 걸로 합의 후 돌아갔다. 그리고 소장님은 내게 철골 구조도 도면을 주고 가시며 확인을 부탁하셨다. 드디어 철골 적재에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소장님이 떠난 후 삼수딘은 곧장 철골 제작사로 찾아갔다. 명분이 생긴 나는 삼수딘의 뒤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삼수딘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됐다. 삼수딘은 8년 넘게 창고에서 철골을 적재했음에도, 철골 도면도를 볼 줄 모른다. 그래서 제작사 현장 작업 반장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물건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철골을 조립하는 게 제작사의 역할이란 것도 알게 됐다.


 철골 제작과 배송 그리고 조립까지 한 회사에서 주무르고 있다.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현장을 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중간에서 확인해야 할 사람이 눈뜬장님이었다.


 그래서. 철골 제작사는 현장에 철골 결합을 진행할 용접인력을 보낼 수 없을 때, 일부러 작업을 할 수 없도록 철골을 조합해 보낸다. 마치 이번에 기둥을 하나만 보낸 것처럼 말이다. 도의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이런 일은 회사 차원에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정작 담당자였던 삼수딘은 담뱃값 정도만 손에 쥐어주면 욕을 먹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쓴다. 이제는 이것을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매일 아침 철골제작소를 찾아 문을 두드린다. 철골 작업 일정을 확인해 그날 제작될 예정인 철골 넘버링을 각 현장에 문자로 보고 한다. 그러면 현장에 있는 소장님들은 내가 보낸 간단한 문자를 보고 오케이를 외치던, 아니면 제작소 사장 야니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욕을 하건 협상을 하건 진행한다.


철골 적재가 있는 날이면 현장을 돌며 필요한 철골에 미리 표시를 해놔 따로 빼놓도록 시킨다. 현장에서 들어오는 컴플레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가 움직일수록 창고에서 내 입지는 커졌다. 반대로 여태껏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받고 대충 일했던 삼수딘이 무능이 드러난다. 창고에서 삼수딘의 입지는 계속해서 줄어든다. 


그런데 창고에 곪은 고름이 비단 이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분명 서류상으론 루디와 삼수딘은 동 직급인데, 루디는 삼수딘의 부하직원처럼 보인다. 이유가 뭘까. 가만히 보니 창고의 모든 일용직을 삼수딘이 뽑았다. 뒷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몰라도 모두가 그의 수족이다. 루디는 삼수딘의 도움 없이는 창고에 들어오는 물건을 확인하기도 어렵다. 즉, 일용직 선정에 비정상적인 입김이 있음이 확실하다.


 또 다른 고름이 하나 더 보였다. 창고 소속 운전기사에게 이중으로 식비와 교통비를 지급하고 있다. 창고의 경리는 본사에서 보지만, 영수증은 삼수딘이 취합한다.


 보통은 물건을 받는 현장에서 통행료와 운전기사 식비를 정산해 준다. 만약 현장 사정으로, 운전기사가 현장에 며칠 머물게 된다면 그 기간 현장에서 식비를 제공한다. 내가 현장에서 경리를 해봤기에 잘 안다. 하지만, 창고에서 정리된 장부를 보면, 통행료와 식비를 정산해 줬다고 나온다. 대충 눈으로만 훑어봐도 한 달에 10만 원 넘게 빼돌리고 있었다. 그리 큰 금액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참고로 현장 일용직 일당이 만원 인다. 삼수딘이 뒷돈을 챙기는 주머니를 하나 찾았다. 하지만 따로 말하진 않는다.     


 곪은 고름을 짜내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고름이 나올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름을 짜내는 게 꼭 현장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만큼만 고름을 짜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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