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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강 Nov 14. 2024

운이좋았던 해외취업

창고에서의 시간은 나를 망치기 충분했다.

창고에서의 두 달은 나를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행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은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는 시간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승진하고 발령받을 때까지만 즐거웠다.     


 창고로 간 첫날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내 첫 현장이다. 건설은 몰라도 창고는 안다. 대학교 시절 4년 내내 창고에서 일했다. 물류 관리사 자격증도 공부 없이 경험으로 땄다. 심지어 구매 업무를 하면서도 자재관리도 직접 했었다. 경험은 충분히 쌓여있었다.


 창고 출근 첫날 TBM(아침조회)을 진행해야 하는데, 정직원들은 보이지 않고 일용직 직원들만 있다. 일용직 직원들한테 창고직원을 데려와 달라고 말하니, 뭐가 두려운지 모두가 부르길 꺼린다. 결국,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신호가 한참을 흐른 뒤에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잠이 덜 깬 목소리에 짜증이 났다. 직원들은 숙소가 아닌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고 걸어 나온다. 터덜터덜 나오는 게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다. 정신 차리고 작업 복장으로 갖춰 입고 신발도 갈아신고 오라며 돌려보낸다. 느릿느릿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저들이 진짜 꼴을 베기가 싫고 화가 난다.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참는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화를 삭인다. 아무리 내가 직급이 높을지라도 나는 방금 굴러 들어온 돌이다. 저들은 나와 같이 일할 동료다. 박힌 돌은 인정해주고 박힌 돌 옆에 있는 양지바른 땅에 묻혀야 한다. 화를 삭힌다.     


  TBM이 끝난 후 삼수딘과 루디의 설명을 들으며 창고업무를 파악해 나간다. 오전에는 현장에서 요청받은 물건들을 트럭에 실어 보낸다. 오후에는 뭐라 뭐라 하는데, 요약해보니 일용직은 철골 페인트칠을 하고, 지게차를 운전하는 삼수딘은 페인트 칠이된 철골을 뒤집어 주는 게 끝이었다. 지게차로 툭 툭 밀면 끝나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삼수딘은 오전에 일하고 오후는 거의 놀았다, 오전을 놀았던 루디는 오후도 놀았다. 본사에서 당장에 둘 다를 자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갈 길이 구만리 길이다. 일단 운전 기사에게 부탁해 음료수를 사와 인부들에게 돌린다. 회사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직원들 민심을 얻어 나쁠 건 없으니깐. 

    

 혼자 창고를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할 일이 뭔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킬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한다. 이전 현장에서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뭘 할 수 있는지 고민만 하면 됐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내가 총괄 관리자다. 나뿐만 아니라 남도 일을 잘 시켜야 한다.     


 내 경험상 현장에서 편하게 일하려면 경력이 오래된 사람을 대우해줘야 하고, 현장을 바꾸려면 경력이 오래된 사람을 괴롭혀야 한다. 일단은 적응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창고 밥을 오래 먹은 삼수딘을 잘 구슬려 보기로 한다. 대신, 창고에 온 지 얼마 안 돼 삼수딘의 텃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루디에게는 일을 주어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일단 루디에게 창고 자재리스트 정리를 지시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삼수딘이 자신이 파일을 갖고 있다며, 1년 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됐던 자재 리스트를 내놓는다. 자재는 매일 나가는데, 1년 전 업데이트한 리스트를 들이밀면 어쩌라는 건지, 그리고 그런 게 있으면 빨리 줘서 일할 수 있게 해주든가 하지 하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한편으론 삼수딘이 지금 자재리스트를 내놓은 의도가 뭘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소년 탐정 김전일이 추리에 막히면 할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듯. 삼수딘의 의도가 뭘까 고민하니 소장님의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일단 저 새끼들을 믿으면 안 돼 아주 음흉한 놈들이야." 삼수딘의 음흉한 속마음을 파악해야 한다. 이 자식은 왜 지금 이걸 줬을까? 분명 삼수딘의 행동엔 뭔가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다. 그리고 그의 의도에 자신이 창고에 오래 있었고 많은 걸 알고 있으니 대우해 달라는 시위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박힌 돌 삼수딘과 본격적으로 기 싸움이 시작된 건 Wire Mesh가 대량 입고되면서부터다. 본사에서는 달러와 철 가격이 급격하게 오른단 뉴스가 연일 뉴스에 나오자 사용할 용도가 다양한 철로 만들어진 Wire Mesh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리 튼튼하지는 않지만, 기초공사에 들어가는 철근을 대신할 수 있다. 한국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선 도로나 창고바닥 만들 때 주로 사용된다.     


  Wire Mesh는 철근을 대신하기에 녹은 슬어도 된다. 하지만, 휘어져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강도가 약한데 휘기까지 한다면 철근으로서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대량 매입을 한 탓에 지게차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 처음엔 받침대를 잘 깔고 적재하더니, 오후가 되자 받침대를 대충 놓고 적재한다. 받침대를 촘촘하게 놓지 않으니 무게 때문에 Wire mesh가 처지면서 휘기 시작한다. Wire mesh가 휘다 못해 받침목을 지나 바닥에 닿을 지경이 됐다.      

 

삼수딘에게 말해 다시 적재하라 지시했지만,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며, "그렇게 다시 쌓고 싶으면 당신이 쌓아"란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20살 때부터 지게차를 탔다. 자격증은 없는 야매 드라이버지만, 지게차 운전에 자신 있다. 지금 눈앞에 잘못 놓인 자재들을 다시 쌓을 수도 있는 실력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군대에서 할 줄 안다고 하면 계속 시킬까 봐 모르는 척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지금 당장에 내가 답답하다고 지게차를 운전하면 앞으로 나는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쌓을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명인이 말했던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가"란 말도 떠올랐지만, 답답하다고 내가 필드에서 뛴다면 나는 지게차 운전사인가 아니면 관리자인가. 각자의 역할이 있는데 내가 그걸 뺏는다면 그게 옳은 해결책일까? 관리자로서의 고민과 꼬리를 무는 질문에 머리가 아파져 온다. 일단 삼수딘을 만나야겠다.     


 화를 내며 자리를 피한 삼수딘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다.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로 뭔가를 하는 루디를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삼수딘과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20살 때부터 공장과 창고에서 지게차를 몰았던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이 끝나자 삼수딘은 약간 놀란 듯 보였다. 얼굴에 보이던 의구심도 약간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얼굴 한편에 남아있는 반발심은 그대로다.     


 반발심은 말로 나타난다. 지게차를 운전할 줄 알면 직접 운전하라 말한다. 차분하게 내가 지게차를 몰아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조금씩 반발심이 줄어드는 게 보인다. 이번엔 새로운 감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바로 불안감이다. 설마 하는 생각에 살짝 찔러 본다.      


"현장이 생기면 현장으로 갈 거고, 본사에 빈자리가 생기면 본사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월급 많이 받는 한국 사람을 돈도 안 되는 창고에 오래 두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삼수딘의 표정 점점 펴진다. 아, 혹여나 굴러들어온 돌에 자리를 뺏긴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뺏긴다고 생각한 것인가.      


 내 말을 들은 후 표정이 편안해진 삼수딘은 나와 함께 Wire Mesh를 다시 예쁘게 적재해놨다. 잘 정리해줘서 고맙다며 저녁에 앙고르메라(인도네시아 전통술)를 마시라며 100,000rp를 몰래 쥐어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는 시원하게 뚫렸는데 가슴이 답답하다. 나도 집에가서 가슴이 뻥 뚫리게 맥주를 마셔야지. 뻥 뚫려야 할텐데. 뻥 뚫리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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