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뒤집기. 부셔진 시계.
모래시계 안 모래가 다 떨어져 간다. 하지만 난 이제 모래시계를 뒤집을 힘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내가 떠나지 않자 삼수딘은 노골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현장직원들에게 청소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할 뿐이다. 아마도 삼수딘의 입김이 있음이다. 너무나 유치한 방식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이었으면 위협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빡 삼수딘, 현장직원들이 쉬는데 청소도 안 하고 있네요? 현장에 제가 모르는 일이 많은 겁니까? 아니면 인원관리가 안 되는 겁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인원관리는 제가 합니다."
"예 저는 현장 관리를 합니다. 현장에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는 게 제 일입니다."
"그럼 당신이 현장에서 자재 나르고 땀 흘릴 거야!"
"저렇게 일 안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르던가 일 시키던가 하세요."
말 몇 마디에 삼수딘의 1차 봉기는 끝이 났다.
현장직원이 다시 열심히 일한다. 자를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나와 삼수딘 사이에서 저들이 고생한 것 같아 시원한 음료수를 한 박스 사서 돌린다.
그런데 아직 삼수딘이 정신을 못 차린 걸까? 바로 2차전을 시작한다. 내가 짜놓은 배송 순서를 마음대로 변경해놨다. 창고 입장에서 보면 어느 현장을 가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물건이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물품이 늦으면 늦는 만큼 손해를 본다. 매일 아침 최대한 현장에 지장 가지 않도록 짜놓은 동선이 망가진다. 당연히 현장에서 항의가 빗발친다.
삼수딘과 트럭 운전사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아는 듯 앉자마자 변명부터 시작한다.
"미스터 트럭 운전이 생각보다 많이 힘듭니다. 그리고 ## 현장 가면 인부들이 많이 없어서 하역이 늦어지고 하루 일정이 꼬입니다."
"그건 도착 전에 현장에 연락해두면 되는 거고, 이유가 안 됩니다.“
변명을 정론으로 맞선다.
"이해가 안 되네! 현장에서 안 된다는데, 당신은 된다고 하면 당신이 현장에서 일해야지."
삼수딘은 정론을 우기기로 반박한다. 그리고 호칭이 Mr에서 You로 변했다. 입씨름이 길어져 봐야 좋을게 없다. 얼마 전 찾은 고름을 터트린다.
"아, 예 마음대로 해요. 그런데, **현장에 있을 때 제가 밥값 드렸던 것 같은데, 여기서도 밥값 지급 내역이 있네요?"
어설프고 허술한 협박이다. 하지만, 그런 아무리 어설퍼도 속에 알맹이가 묵직하니 효과는 대단했다. 두 사람은 전신주에 걸린 참새 마냥 정신을 못 차린다. 뭘 더 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가 말씀드린 순서대로 현장 도세요."
대답은 없지만, 저들이 내 말을 따를 것을 안다. 그렇게 나는 창고를 장악했다는 착각에 빠졌다.
워낙에 효율이 엉망이었던 창고였기에, 약간만 손을 봤는데 성과가 있다. 성과가 있으니 건드는 사람도 없다. 맘 편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라마단 기간이 끝나가고 르바란이 시작될 무렵, 삼수딘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대놓고 내 지시를 거부하고, 내가 사전에 정해놓은 배송 경로를 마음대로 틀어 버렸다.
"빡 삼수딘, 방금 연락 왔는데, 납품 차량이 안 왔다네요?"
"예, 급하다고 해서 다른데 먼저 보냈습니다."
"그럼 저한테 이야기 해야 했던 거 아닐까요?"
"급하다는데 그걸 말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일정 바뀌었다고, 다른 현장에는 말해줬습니까?"
"제가 왜요?“
느낌이 싸하다. 태도가 너무 뻣뻣하다. 모르겠다. 지금 쎄게 말하면 뭔가 싸움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일단 한발 빠져서 지켜보기로 했다.
"내일부턴 일정 변경되면 단톡에 올려주세요. 일단 오늘 항의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대꾸도 없다, 다음 날도 또다시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경로를 바꿔 버렸다.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하지만 저리 뻣뻣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니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조용히 루디를 불러내 이유를 물어봤다.
"루디, 요즘 빡 삼수딘이 왜 저러는 거야?"
“헤이 미스터, 그 새로 온 현장 소장이 지난번에 삼수딘 불러서 뭐라 하던데?”
시간이 지나면서 루디가 똑똑한 친구였음을 알게 됐다. 고등학교 때 사고를 크게 치는 바람에 대학교를 못 갔을 뿐 일머리도 좋았고 영어도 잘했다. 형제자매들은 전부 다 약사라고 했다. 루디는 영어를 잘했기에 영어로 대화하다 보니, 사무적인 느낌보단 친구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소장이 돈 줬어?"
"아마도?"
돈을 줬다고 저렇게 바뀌었다? 새로온 소장님이 특별한 힘이 있는 건 아니다. 고작 그 정도 이유로 저렇게 뻗댈 리 없다.
몸은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고 있지만 모든 촉각은 삼수딘을 향해 세워놨다. 그러던 중 이상한 손님이 창고를 방문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군인은 응접실에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고, 삼수딘은 가방과 종이 하나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갔다 나온다. 남자는 떠나고 삼수딘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빡 삼수딘, 방금 누가 왔다 간 겁니까?"
"르바란 찬조금 전달했습니다."
"찬조금요?”
삼수딘은 자랑스럽게 이름이 가득 적힌 종이와 가방 가득 든 돈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전에
돈을 건네주고 받은 서명을 보여준다.
"방금 왔던 사람은 이 지역 군인이고, 앞으로 경찰, 소방서, 이장 등 지역 유지들한테 돈 줘야 합니다."
돈을 준다고 효과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돈을 주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르바란 기간 때 일을 할 수가 없고, 운이 나쁘면 르바란이 끝난 후 회사 입구에 이름 모를 차들 길을 막고 서 있을 수도 있다. 적절한 금액을,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줘야한다. 창고에서 삼수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조금 리스트. 저게 지난 며칠간 태도가 바뀐 이유였다. 굉장히 중요업무를 자신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 이유였다. 오지에 있는 창고에서 8년 가까이 버티며 쌓아온 세월의 힘이 삼수딘에게 있었다.
자신의 입지를 알게된 삼수딘은 일을 더 개판으로 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항의가 끊임없어 올라온다. 컨트롤이 안된다. 본사에 넌지시 물어봤지만, 자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일 편하자고, 내 입지 지키자고, 한 집안의 가장을 밖으로 내몰 순 없었다.
당시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삼수딘을 내보내거나, 아니면 내가 그만둬서 어지러운 꼬락서니를 안 보는 것이었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틀 밤낮을 고민하고 사표를 썼다.
어렸고 어리석었고 독단적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