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버린 내장죽
3일차
쉬어버린 내장죽
20대 때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여자들이 있는 테이블에 말을 걸고 합석하는 것도 좋아했다. 주말이 되면 원대한 꿈을 갖고 서면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침까지 친구와 둘이사 소주를 마시며 우정을 돈독하게 만들어 나갈 뿐이었다. 그때 자주 가던 곳이 있다. 새벽 5시까지 하는 통닭집인데, 사이드 메뉴로 닭죽을 팔았다.
헌팅에서 이리 까이고 저리 까이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통닭집에 들어간다. 닭죽 두 그릇을 놓고 소주 딱 한 병만 마시자며 잔을 주고받다 보면 닭죽이 모자라고, 닭죽이 남으면 술이 모자랐다. 한두 병 쌓이다 보면 사장님이 마감 시간이 다 됐다며 서비스로 닭죽을 한 대접을 내어주신다. 그럼 진짜로 딱 마지막 소주 한 병을 더 시켜서 닭죽을 다 먹을 때까지만 마시고 술은 남겼다. 술에 대한 매너는 아니었지만, 마감하고 집에 가야 할 사장님에 대한 매너는 지켜야 했으니깐.
뜬금없이 20대 때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지금 기분이 그때와 같기 때문이다. 원대한 꿈을 꾸며 돼지내장 구이를 먹으러 왔다.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안주를 상상했지만, 결과가 실망스럽다. 마치 헌팅에 실패했던 어린 시절의 감정과 같다. 친구는 없지만, 베트남에 닭죽은 있겠지. 오늘의 아쉬움을 채워야겠다. 그게 음식이든 술이든.
호텔 근처에 있는 슈퍼에서 맥주 몇 캔을 사고 그랩푸드로 배달을 시킨다. 아쉽게도 근처에 닭죽 파는 곳이 없다. 찾다 보니 돼지 내장죽이 보여 일단 시켰다. 배달료가 아까워 내일 아침까지 먹자는 생각으로 두 그릇을 시켰다. 미리 끓여 놓은 걸 담아서 왔는지, 주문 5분 만에 배달이 도착했다.
시킬 땐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시키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돼지 내장죽은 뭐지? 내장국밥하고 비슷하려나? 이것도 비린내 나는건 아니겠지. 불안해하며 봉지를 뜯고 테이블에 세팅하는데, 냄새가 좋다. 음식에서 맛집의 향기가 난다.
조심스레 첫술은 뜬다. 후후 불면서 입에 넣고 음미한다. 일단 식감이 우리가 알던 죽 느낌은 아니다. 약간 거칠다. 비유하자면, 샤부샤부 집에 가서 마무리로 국물 약간에 밥 넣고 계란 넣고 만들어 먹는 죽에 국물을 좀 많이 남기고 만들었을 때의 식감이다. 식감이 나쁘지 않다.
죽은 고소하고 굵은 후춧가루에서 오는 알싸한 매콤함이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 느껴지는 푹 삶은 내장의 감촉과 내장을 씹을 때마다 나오는 내장 특유의 맛도 좋다. 절로 술이 당기는 맛이다. 호텔에 쟁여놓은 맥주를 꺼내 한 모금 한다. 아 그런데 이건 범죄다.
돼지 내장죽과 맥주는 전혀 안 어울린다. 그렇다고 소주를 사 오기는 너무 귀찮다. 내장만 건져서 맥주를 마신 후 남은 죽은 내일 아침에 먹기 위해 남겨둔다. 원래 식은 죽이 더 맛있다.
다음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죽을 꺼내 먹었다. 하지만 입에 넣자마자 바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죽이 단 하룻밤 사이에 쉬어버렸다.
어제 너무 뜨거워서 냉장고에 안 넣고 잤더니. 몇 시간 만에 쉬어버리네, 무(無)방부제인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