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야구장을 몇 개 합쳐놓은 것보다 큰 크기의 거대한 생산공장 건설현장이다.
원청에서 수십 명이 나왔고, 수십 개의 하청업체가 매달려있다.
그 매달려 있는 업체 중 한 곳이 우리 회사였다.
새로운 현장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다.
현지인 경리, 현지인 관리자들 그리고 아직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새로운 소장님.
결제칸에 이름 없는 관리자. 담당구역조차 없는 관리자.
이곳에서 쓸모가 없다.
본사 이사는 일을 배우라고 보냈다 하는데, 글쎄.
단순한 판넬 설치작업과 철근 배근 작업에서 더 배울 것도 없다.
어차피 사표도 한번 쓴 마당에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잘려도 그만이다.
하지만, 그만두는 것과 잘리는 건 다르다. 자존심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이전에 현자에서 어떻게 했더라?
티브이 속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면, 흐릿한 내레이션이 들려와 주인동을 도와준다.
예전 현장 소장님이 흐릿하게 나타나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해준다.
"원청사람들이 뭣도 몰라도, 한국인이 현장에 보이면 일하는구나 생각하고, 현장에 현지인들만 보이면 현장에 신경을 안 쓰는구나 생각하니깐, 일단 현장 돌아다녀 봐."
소장님 말대로 땡볕에 걷고, 비 맞으면서도 걸어 다녔다.
원청사람들은 그런 나를 좋아해 줬다. 현장을 떠난 뒤에도 나를 많이 찼아다.
그래 일단 걷자.
사무실에서 현장까지 직선거리로 약 1.2km 다.
가방에 물통 하나 넣고 걷는다.
도로도 깔리지 않는 비포장도로를 걷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진흙에 발이 푹푹 빠지지만, 그래도 걷는다.
오전 11시면 뜨거운 태양에 현지인들은 햇빛을 피해 숨는다.
하지만 나는 걷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수행자는 아니지만,
수행자의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다.
매번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지겨우니 반대방향으로 걷는다.
이쪽으로도 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본다.
계속 걷는다.
걷다가 우리가 담당할 작업장이 보이면 사진을 찍는다.
별것 아니어도 사진을 찍는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원청 소속 늙은 한국인 안전관리자가 나를 부른다.
"당신 어디 소속이야?"
시작부터 반말이다. 당당히 소속을 밝혔다.
"왜 그리 현장을 돌아다니냐?
"비 오면 현장이 괜찮은가 봐야 하고, 땡볕이 뜨면 직원들 농땡이 치는 거 잡아야 해서 돌아다닙니다."
"쯧"
혀끝을 차곤 인사도 없이 가버린다.
다시 걷는다.
알만한 사람들은 내가 시늉만 하는 중이란 걸 다 알고 있다.
안전 담당자도 그래서 나를 붙잡았겠지.
하지만, 이런 시늉이라도 해야 나는 내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