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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27. 2019

설거지가 유난히 하기 싫은 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 무늬에 눈길이 갔다. 빗금이 처져있었다. 그 빗금 아주 오래전 골동품 그릇을 떠올렸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다.


순간 환상이 어른거렸다. 그 토기를 씻던 아주 오래전 원시인 얼굴이.


상상을 해 본다. 밑바닥이 뾰족하던 그 그릇을 어떻게 씻었을까? 강에 가지고 나가서 씻었을까? 아님 물을 떠 와서 커다란 그릇에 담아서 씻었을까?


왼손으로 그릇을 잡고 오른손으로 그릇을 돌려가면서 씻었을까? 오른손으로 그릇을 잡고 왼손으로 돌려가며 씻었을까?


아니 그보다 오른손잡이가 더 많았을까? 왼손잡이가 많았을까?


의문은 멈출 줄을 모른다. 밥은 누가 하고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 설거지를 안 하겠다고 서로 싸우지는 않았을까?


먹을 것이 없어서 며칠간 굶은 적도 있었겠지? 땐 설거지 그리웠을?


겨우 마련한 음식을 저장해 두었는데 그릇이 약해서 깨지고 음식을 버리게 된 적은 없었을까? 그래서 통곡을 했을지도.


깨진 그릇으로는 설거지를 할 수가 없.


설거지를 한다는 건 밥을 먹었다는 증거다. 볼품없는 풀로 죽을 쑤어먹었든, 신선한 고기를 향신료로 요리를 해 먹었든.


그릇을 씻고 나면 다들 화롯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때의 손길이, 그때의 노동이 느껴진다. 지금 숨 쉬는 공기 속에 그 시대의 공기가 뒤섞여 이어진다.


손빨래는 세탁기로 대체된 지 한참 되었다. 그런데  유독 설거지 손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식기세척기를 써 봤지만 밥풀이나 음식찌꺼기 등을 제거하고 그릇을 종류대로 세우는 게 더 번거로웠다.


결국 손으로 일일이 씻는 걸로 돌아서곤 한다.


요릴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설거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단순하고 더럽고 동작이 뻔히 예상이 되는 데다, 설거지를 잘한다고 해서 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리사나 세탁사는 있어도 설거지사는 없다.


아무도 욕망하지 않는 기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 작업. 그 속에 설거지가 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다음 끼니를 이어가기 힘들다. 새로운 끼니를 담을 그릇을 마련해야 하고 싱크대를 치워야 하니까.


이렇듯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누구에겐 한 시라도 더 연장하고픈 이다.


친구가 희귀 암에 걸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딱 두명만 있다는 난치암인데 국내 1호 환자는 이미 사망했단다.


친구는 최근 수술을 했지만 통계상 예후가 좋지 않아 낙관할 수 없다. 그 친구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노력해도 잘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 문제였다. 그러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런 고민을 한다는 자체가 행복한 줄로 생각해라. 누군가를 미워할 수만 있어도 행복한 거야.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 친구는 얼마 전 지인들을 초대해 콘서트를 열었다. 평소 건강할 때부터 오랫동안 이끌어왔던 직장인 밴드였다.


친구는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져서 모자를 쓰고 나왔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까지 불렀던 친구. 친구들은 생각보다 표정이 밝다며 좋아했다.


러던 친구가 전화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도 죽는 거 너무 무서워. 사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구나."


원시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수많은 삶과 죽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다시 태어나고. 그 반복 속에 끊김 없이 일어난 일. 먹고 비우고 씻고 다시 채우고 다시 비우는 일.


우리는 요리를 해 준 사람은 기억하지만 설거지를 해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놀러 가면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친구가 있었다. 누군가 요리 솜씨를 뽐내고 박수를 받을 때 조용히 숙소 정리하고 밥 먹은 후 설거지를 해 치우곤 하던 친구.


설거지 동작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비슷할 것 같다. 바로 한 손으로 그릇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릇을 돌려가며 씻는 것이다.  


동작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우리 생을 유지시켜주는  심플한 의식.


이처럼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뻔한 일상의 노동. 어쩌면 그 속에 우리 생의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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