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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r 18. 2020

사재기 안 하고, 싸움 안 하는 나라

고난을 멋지게 활용하는 법

공원에서 운동을 하다가 처음 보는 기계가 있길래 곁에 있는 할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아주 씩씩한 음성으로 상세히 가르쳐 주신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할머니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자 빵빵 터지는 할머니의 말씀들.


내가 코로나 때문에 우울해진다고 하니,

"왜 자기 뇌를 스스로 죽여. 뇌는 내가 만드는 대로 움직이는 거야. 좋은 생각만 해야지."


남편이 집안일을 안 도와준다고 하니,

"그깟 집안일 갖고 뭘 그래. 말도 마. 우리 남편은 지금까지 돈을 하나도 안 벌어다 주었어. 돈만 안 가져다주면 좋게? 그놈의 노름빚을 어마어마하게 져서 내가 다 갚아줬지."


원래 전라도 광주에 사시는 분인데 막내딸 집 근처에 남편과 원룸을 얻어 사시면서 자식, 손주들 살림을 도와주신다고.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하셨으면서 왜 아직까지 자식들 손주들 밥 다해주고 키워주냐고 하니,

"이게 왜 고생이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들을 볼 수 있고, 내가 아직까지 누구에게 밥을 해 먹인다는 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데."


내가 할머니라고 부르니,

"내가 왜 할머니야? 그냥 언니라고 불러. 할머니는 힘이 없고 처져 있는 사람에게나 부르는 거라고."


이 할머니, 매. 력. 있다.


이 할머니는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던 걸까?

"할머니 지금까지 뭐 하셨던 거예요?"

"뭐하긴 뭐해? 나는 초등학교 1학년 공부가 다야.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때 늑막염으로 학교를 쉬었지. 다 고쳤을 때가 중학교 1학년 나이였는데, 어린애들과 학교 다니는 게 싫어서 그만두었어."


할머니가 살아오신 인생은 대략 이렇다. 이른 나이에 9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서 시어머니가 50세에 낳으신 시동생을 직접 키웠다. 그런데 남편은 도박을 일삼아 월급을 하루 만에 다 날리고 빚을 지기 일쑤였다. 거기에다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심해서 매일 울면서 살았는데 나중에 치매가 걸리셨다. 설상가상으로 이 치매는 특이하게도 남을 때리는 치매. 돌아가실 때까지 7년간 맞는 치매를 홀로 감당하셨다. 경제적인 부담도 짊어지셨는데 평생 보따리 장사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시동생 시누이, 또 그 자식들 공부까지 시키셨단다. 삼 남매를 두셨는데 자식들 집에다 차까지 다 사주셨고, 칠순잔치 땐 모두 직접 불러서 음식이며 주차비까지 본인이 다 내셨다고.


이 할머니는 현재 건물을 소유하고 계신 부자인데도 가지고 계신 폰은 2G 폴더폰이다. 최저 요금제로 쓰고 받는 것만 하시니 한 달에 5000원만 나온다고. 근검절약이 철저히 몸에 배신 분이다. 이분은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자신은 비싼 음식을 먹거나 할 때마다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주위의 어려운 분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학비도 대주고 쌀도 사주고 하신단다.


이분은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하신다. 누구보다도 고난이 많은 인생을 살았는데, 그것은 고난을 헤쳐온 과정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용기를 주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힘든 이야길 꺼내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러면 자신이 제일 괴로운 줄 알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남편 흉을 보던 사람은 자기 남편은 그나마 도박은 안 하니 다행이라고 한다.


또 시어머니 흉을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길 해주면 자기 시어머니는 때리진 않는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육아가 힘들다며 투덜거리는 엄마 앞에선 시어머니 출산 뒷바라지부터 갓난아이 시동생 기저귀 갈고 업어 키운 이야길 해 준다. 또 돈이 없다는 이야길 하면 자기가 가난한 집의 9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보따리 행상부터 시작해서 빌딩 세운 이야길 해 준다.


즉 아무리 힘든 사람이 와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 다들 고개 숙이고 간다고. 그리고 자신은 남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걸 보람으로 삼으신다. 자기 얘길 들으면 다들 해소가 되었다고 하니까.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툭툭 유머 삼아 던질 줄 아는 사람의 그릇은 과연 얼마나 큰 것일까? 그 그릇은 그 불행을 극복해낸 자부심으로 빚어졌다.


그 할머니 아니, 그 언니에게는 승리한 자만이 지니는 위엄이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인생에 단단히 기둥을 박고 그 기둥에서 뿌리를 내리고, 울창한 나무가 되어 성장한 위엄. 그 나무에 새들이 날아오고, 그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와 닿았다. 

"나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야. 힘들 때마다 몇 번이나 도망가려고 했었지. 하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다시 오곤 했어. 하지만 다시 온 게 백번 잘한 것 같아.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내가 좀 멋있거든. 고생 없이 곱게 산 노인들과 이야기해 보면 재미가 하나도 없어. 그 노인들은 꼴랑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모르는 거야. 난 그동안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남일 같지가 않아. 그래서 내가  해줄까부터 생각하거든."




최근 한국의 코로나 19 대처능력에 대해 세계가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 휴지 사재기도 안 하고 마스크 살 때도 질서 정연하게 줄 서고, 입국 통제도 안 하면서 방역에 성공하고. 무엇보다 감염위험에도 불구하고 대구로 달려가 봉사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말이다. 상대적으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양 사람들 눈에는 신기한 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 뿌리 박혀서일까?


이에 댓글 하나가 날아와 박힌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데다가, 초강대국들 사이에 낀 쬐그만한 나라로서,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서 그런가 보다.'


나는 여기 덧붙여본다. '고난을 극복한 경험' 앞에다가, '아주, 멋지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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