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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y 21. 2020

나 혼자 떠들면 안 되는 이유

대화 시 1/n 지분을 유지할 것

신부님: 무슨 죄로 왔지?

나: 네. 저는 도둑질을 했어요.

신부님: 돈? 아니면 물건?

나: 아뇨. 그게 아니고 남의 지분을 빼앗았어요.

신부님: 땅을 빼앗았다고? 그거 좀 센데...

나: 그게 아니고요. 그게 말하자면 지분은 지분인데 시간을 말하는 거예요.

신부님: 시간의 지분을 빼았았다고?

나: 네. 저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항상 혼자 떠들었어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안 주었답니다. 예를 들어 네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두 시간 대화를 하면요, 제가 최소한 1시간 이상을 떠들었더라고요.

신부님: 그건 말이 안 되지. 적어도 30분 이내로 떠들어야지.

나: 제 말이요. 그게 요즘 후회돼요.

신부님: 하필 요즘 그게 떠올랐던 이유는?

나: 요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제 입이 너무 심심한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100% 퍼붓다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혼자 떠들었는지 선명하게 알게 되었어요.

신부님: 그럼 간단하네. 앞으로 정확히 1/n로 떠들면 돼.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면 무슨 죄를 고백할까 생각해보았다.

도둑질?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무슨 댐 건설한다고 모금할 때 해봤다. 부모님께 부풀려서 말하고 삥땅 친 거.

거짓말? 그건 기억력이 나빠서 못 한다. 양다리 연애도 헷갈려하다가 들통나서 딱 일주일 갔다.

살인이나 강도? 만약 했다면 사법부에서 먼저 처리했을 테고. 다행히 아직 전과는 없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 도둑질이다. 도둑질은 도둑질인데 물건이 아니라 남의 시간과 집중력을 도둑질한 것.


요즘 하도 시간이 많다 보니 이것저것 상념에 사로잡힌다. 특히 왕수다쟁이인 내가 '사회적 거리두기'(내겐 지옥 같은 '수다 거리두기')를 하려다 보니 우울해지려고까지 한다. 그러자 내가 활발하게 대화 활동을 하던 시절의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학교 교무실에 서류 하나 주러 가서도 그랬다. 실무사 선생님과 수다 떠느라 수업 종이 치면 허겁지겁 뛰어나오고, 교감선생님이 업무 때문에 전화했는데 이것저것 내가 궁금한 걸 한 보따리 풀어놓고.

아이들에게 수업시간에 설명하다가 연관된 이야기로 빠져서 한참 떠들고.(아이들은 이런 이야길 더 좋아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나만 보고 싶었다는 듯이 혼자 떠들고.


모두에게 그랬다. 제일 가까이 있는 남편부터(요즘 남편은 내 수다를 독박 쓰느라 과로사할 지경) 딸, 아들, 또 학교 선생님들, 내가 가르친 학생들, 친구들, 동생,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형님 등등.


그동안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시련들이 눈앞을 스친다.

나는 그들을 혹사시켰던 것이다.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았다. 아재 개그까지 치며 혼자 좋아 죽는다고 웃어가면서.

이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다. 독재적이었다.


남자들은 그나마 공정하다. 술 사는 사람이 말하는 걸로 서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니.

그런데 나는 술 한잔 안 사고 남들을 괴롭혔다니.


중요한 깨달음은 이렇게 모든 것이 중지되었을 때, 늦게 찾아온다.


그동안 내가 빼앗은 시간과 집중력, 그들이 지었을 썩소(썩은 미소).

모든 것을 사과하고 싶다.


그 의미로 정확히 1/n 지분을 유지하면서 대화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당장 오늘부터 남편을 상대로.

안 그래도 요즘 남편이 나에게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데.(신혼시절엔 말이 너무 없어서 답답했던 남편이)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새로이 설계해야 하는 요즘,

나는 의외의 만행들을 각성하고 있다.

앞으로 달라질 성숙한 미래를 위해.



'모두가 즐겁게 참여하는 공정한 토론 문화'

이는 사실 대한민국이 앞으로 펼쳐나가야 할

또 하나의 '뉴 노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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