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의 언어습관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극강의 꼰대 발언이다.
꼰대에게는 없고 안 꼰대에겐 있는 게 뭘까? 이는 어쩌면 꼰대가 되는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공감능력'이다. 공감을 한다는 건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을 비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려면 겸손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서 겸손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곤 한다. 겸손에는 나이 대별로 방해 요소가 있다. 어릴 땐 천지분간을 못해서다. 자기 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자라서는 청소년기의 반항끼 때문이다. 이때 겸손하면 비겁해 보이기 딱 좋다. 또 젊은 시절엔 패기가 겸손을 가리게 된다.
그러다 어영부영 중년이 된다. 이땐 가정이나 직장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 가르친다는 건 많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겸손하기가 쉽지 않다. 노년이 되면 더 심각하다. 이제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 굳이 겸손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나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겸손하지 않을 이유를 달고 산다. 특히나 중년 이후엔 더 심해진다. 이 시기는 사회생활 끝물이기 때문에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
이 '자만 모드'가 잘 드러나는 것이 평소 자주 쓰는 언어다. 한마디로 꼰대스런 말투를 남발하는 것. 예전 아저씨들에겐 클리셰가 있었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자 단어가 많이 사라진 요즘엔 '왕년'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요즘 많이 쓰는 꼰대스런 말투에 뭐가 있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이 많이 쓰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썼다가 된통 혼난 말들이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원래 다 그런 거야."
"내가 젊을 땐 더했어."
"요즘은 그나마 나은 거야."
"다들 살만해서 그래."
이런 말을 할 때의 심정은 뭐랄까. 결코 '있어 보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배부른 투정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그저 현실을 똑바로 알게 해 주면 별로 안 아플 거라는 생각에서다. 이심전심이라니 다 알아주길 바랬을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그 말을 했다간 그 자리에서 와장창 박살이 난다.
음악을 하는 우리 딸이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다고 할 때마다 내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 있다. "원래 예술은 힘든 거야."
나는 기껏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성찰 끝에 한 말이다. 그런데 딸에게는 별로 철학적이지 않나 보다. 오히려 발끈한다. 엄만 왜 맨날 그 말이냐고. 그래서 내가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진심으로 위로를 하고 싶어서 한 말인데 왜 그러냐고, 그럼 어떻게 해줘야 위로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었던 거다. 고객 맞춤 서비로다가.
그러자 딸이 하는 말이 "간단해. 진짜 힘들겠다. 하고 같이 공감해주는 거지."
나처럼 실수하는 남편에게도 알려주었다. 둘이서 사뭇 슬픈 표정까지 연습해가면서. 그런데 그 뒷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또 힌트를 달라고 하면 성의 없다고 화낼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예전에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이 나올 당시만 해도 제목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그 말은 상당히 꼰대스럽게 느껴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그래서 뭐? 아픈 게 당연하니 계속 아프라는 말이야? 하고. 아프면 환자니까 병원에 가야지 무슨 소리야?
요즘이라면 제목이 바뀌어야 할거 같다. 그 당시 이 책이 힐링을 위해 팔렸다는 게 아이러니다. 위로를 하려면 이렇게 제목을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예전에 이서진과 하지원이 나와서 유행했던 드라마 '다모' 대사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누군가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게 사람이다.
딸에게 "진짜 힘들겠다." 다음 말이 생각났다. "네가 그렇게 힘든데 엄마가 해줄 게 없구나. 네가 좋아하는 엽떡(엽기 떡볶이) 시켜줄까?"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