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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Nov 12. 2020

내가 나에게 잘해주기

적어도 떠밀린 펭귄이 되지 않겠다.

 '나 홀대' 경력이 어언 50년 정도 된 어느 날이었다. 어떤 장면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잘해주기로 했다. 진작에 그래야 마땅했는데.


동안 내가 나를 얼마나 막 대했던지. 수많은 일화 중 하나가 떠오른다. 교대를 졸업했지만 건축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덕분에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건축 현장에서 이십 대를 보냈다. 문과인 내게 구조역학이 얼마나 힘들던지. 그 자격증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시험은 계산 문제를 푸는 거라 지우개가 꼭 필요했다. 특히 건축 자재 수량을 뽑는 '적산 시험'시간이었다. 그런데 한 수험생이 지우개를 안 가져왔나 보다. 시험감독관이 내 앞으로 지나갈 때쯤이었다. 한 학생이 턱 끝으로 내 지우개를 가리키며 빌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냉큼 지우개를 건넸다. 감독관에게 의심을 받아 쫓겨날 수 있었는데. 당연히 그 학생이 지우개를 다시 나에게 건넬 줄 알았다.


그 뒤로 이어진 시험시간 내내 여러 번 지우개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내가 간절한 눈빛을 그 학생에게 보냈는데 그 학생이 내 시선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나를 못 본건가 하고 감독관이 앞으로 갈 때 다시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 학생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그때 알았다.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자기도 계속해서 지우개가 필요했을 테니.


그 이후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숫자가 틀리면 박박 긋고 다시 썼는데 분명하게 보일지 의문이었다. 나중엔 시험지가 너덜너덜해졌다. 시험이 끝난 후에는 화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런데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왜 지우개를 빌려줬냐며. 그 행위는 부정행위로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다. 게다가 친구도 아닌 생판 모르는 남에게 대체 왜. 정작 나는 필요할 때 지우개를 못 쓰고.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바보 같았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내 의지로 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행동이니. 매번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한다. 친한 사람을 도왔으면 뿌듯함이라도 있지. 생색도 안 나고 나도 피해를 보는 것, 이건 남에겐 플러스, 나에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둘 다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네 집에 놀러 간 날 그 친구의 학습지 숙제를 도와주게 되었다. 그 친구가 숙제하기 싫다고 울었기 때문. 요즘으로 치면 가정학습 방문지 같은 것이었다. 매일 한 장씩 오는 거였는데 국어 산수 한자 등 문제가 주르륵 있었다. 그걸 하기 싫다고 며칠 미루면 금세 산처럼 쌓인다고 했다. 친구가 힘들어하길래 숙제를 대신해주고 있는데, 친구 엄마가 방에 들어오셨다. 그러자 우릴 보고는 발칵 화를 내셨다. 문제는 나까지 혼이 난 것이다.


왜 남의 숙제를 해주느냐며. 자존심이 상했다. 난 친구를 도우려고 한 것뿐인데.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는가. 맘이 약해서 매번 거절을 못 한 게 문제라면 문제. 이렇듯 남을 돕고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외면하고 심지어 합리화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나도 당당하고 싶고 나에게 잘 대해주고 싶어. 하지만 내가 일단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건 부모님이 만들어주는 거잖아. 우리 부모님이 못 해준걸 내가 어떻게 만들어. 그리고 가끔 말이야. 나처럼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허용적인 사람이 성공이란 걸 해. 자신을 늘 다그치니까 어디에서든 성과를 내 거든. 그런 반사이익쯤은 누려도 되잖아. 그건 나처럼 결핍이 많은 사람이 하나쯤 가지게 되는 장점 아니겠어?'


그러나 이내 돌아서며 씁쓸해하던 나. 또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림을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그동안 네가 양보하고 잘 대해준 사람들이 뒤에선 너를 이용하고 짓밟았지? 네가 당한 일을 '거룩한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긴 해? '비루한 착취'가 아니고? 그들의 악을 방기한 책임이 더 크다고.


나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너무 늦게 알았다. 참 불쌍하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려고? 나를 한낱 유전자 전달 기계로 쓰기 위해서인가.

 

매번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가 된 기분이다. 아니 그보다는 남극 펭귄에 더 가깝다고 할까. 남극의 황제펭귄 무리는 집단 이익을 위해 소수 펭귄에게 비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이 물고기를 잡으려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바다표범에 잡아먹힐까 봐 두렵다. 그러니 물가에 서서 주저하는데, 이때 누군가 뛰어들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없는 경우 앞에 선 펭귄을 슬쩍 떠민다. 그리고 그 펭귄이 무사하면 바다표범이 없다고 보고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불쌍하긴 하지만 영웅 펭귄은 아니다. 떠밀린 펭귄일 뿐. 평소 흐리멍덩하고 말랑말랑하게 보였으니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비록 내가 유전자 운반 기계에 불과하더라도, 그 기계의 성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로서의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2세 생산과 훌륭한 양육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이 우리 종 전체에게도 결국 유리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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