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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ug 30. 2021

미움을 어디에 쓰시게요.

나 혼자 써 내려가던 잘 못된 소설

간혹 미치도록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최근 뛰어난 매력의 소유자를 보았다. 그것도 걸그룹이나 아이돌 멤버가 아니라 그냥 배 나온 아저씨. 유튜브를 보던 딸아이가 나에게 뛰어오며 외쳤다. 엄마가 좋아할 사람이야. 유튜브 범죄 스릴러물을 많이 보는 내게 특히 딱이란다. 황민구 박사다. 범죄 영상 분석가로 방송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딸 말대로 완전히 빠져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매력의 기준에 모두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이렇다.


첫째 겸손할 것

둘째 딱 할 말만 할 것

셋째 은근하게 유머가 뛰어날 것

넷째 한 가지 분야에서 실력이 뛰어날 것

다섯째 무심 시크할 것


그는 방송 내내 빵빵 터졌다. 솔직힌데 너무 웃겼다. 그가 재밌는 말을 했다. 한 의뢰자가 귀신 사진이라고 가져온 것을 아니라고 하니, 맞다고 박박 우기더라는 것이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만일 귀신이 맞으면 어따가 쓰시게요?"였다.

맞는 말이다. 귀신이 맞다면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증거를 찾는 건지 말이다.

 

종종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기어이 증거를 대려는 일들 말이다. 배우자의 외도 증거를 찾는 거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이런 건 어떨까? 상대방이 나를 미워한다며 온갖 정황 증거를 대는 것 말이다. 남에게 하는 거면 차라리 낫다. 반박 증거를 들이대면서 논리를 파괴하면. 최악의 상황은 혼자 시나리오 쓰고 감독하고 주연을 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다. 그것도 수십 년에 걸친 장편 영화. 장편 영화를 찍는 내내 자기 학대를 한다. '다들 나만 미워해.' 하면서.


최근 미움을 걷어낼 일이 생겼다. 긴 시간 동안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그럴싸한 논리를 삼단논법, 연역법 등을 동원해가며 강변해대었다. 증거를 찾기 위해 강력계 형사반장처럼 뛰어다녔다.


그런데 최근 전의를 상실하는 일이 생겼다. 그 주인공이 힘 없이 죽어감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굴 미워해야 하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가 나를 미워했다고 사무치게 울부짖어야 하나?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주인공이 병들어서 내가 묻어둔 게 아니다. 며칠 전 그 주인공과 시간을 가졌다. 몇 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그동안 내가 오해를 한 부분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책의 찢어진 귀퉁이를 손에 쥔 게 문제였다. 혼자 부풀리고 각색하고 상상을 덧붙여 왔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하소설 분량의 증오 소설이 탄생하게 되었다. 원작자가 의도한 주제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잘못된 소설이었다는 걸 알게 된 나. 패자가 된 기분이다. 가만 보자. 그런데 이게 억울할 일인가? 대체 왜?


황민구 박사가 말한 "귀신이 맞으면 어디에 쓰게요?"가 생각났다. 그 '미움'이 맞으면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동안 허비한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미움귀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쓱쓱 그려내고 직접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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