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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y 20. 2019

지금은 없어서 그리운 것들

커다랗던 몽고반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딸이 얼마 전 음료수 컵을 들고 있다가 잘못해서 쓰러뜨릴 뻔했다. 그러자 “아이코”하면서 아기 옹알이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짧고 작은 소리는 내 귀를 하루 종일 맴돌더니 나를 우리 딸의 어릴 적 시간들로 데려갔다.  


우리 딸은 제대로 말을 하기까지 과도기 언어가 꽤 오래갔다. 되는대로 하루 종일 떠들었는데 그 말들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그 당시 내가 쓰던 육아 일기장에 따로 어록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는 ‘하삐’ 할머니는 ‘함미’ 마스크는 ‘따다고’ 아이스크림은 ‘아이스치키미’ 등 자기가 발음하기 좋은 대로 내뱉었다. 중독성이 강해서 남편과 내가 자주 따라 하기까지 했다. 


그 말들은 유통기간이 짧았는데,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고 몇 달이 지나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 건 또 있다. “인상 써 봐.”라고 시키면 눈을 흘기듯이 째려보는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 표정이 귀여워서 매일 시켰다. 


하지만 어른들의 노리개 감이 되기 싫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하나하나 접기 시작했다. “이쁜 짓!”하고 말하면 오른쪽 볼에 검지를 갖다 대던 치명적인 동작까지도.  

그리운 게 하나 더 있다. 우리 딸 엉덩이에 있던 손바닥 만 한 몽고반점. 


아기 때 딱 그 자리에만 있던, 내 아기라는 흔적이었다. 매일 아이를 씻기다 보면 엉덩이와 등 경계선에 커다랗게 푸른 반점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그 모양이 꼭 누가 때린 듯 보였다. 색깔도 깊은 바다처럼 짙푸른 색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그 반점의 위치가 변해 갔다.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엉덩이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며칠 전 옷을 갈아입는 딸아이의 등을 보게 되었다. 목 바로 밑의 등 쪽에 자리 잡은 몽고반점은 손바닥만 하게 컸던 것 같은데 아주 작은 점으로 변해 있었다. 몽고반점이 작아진 걸까? 아니면 내 기억의 오류일까?  

아이는 아랑 곳 없이 떠들고 있었다. “엄마, 있잖아. 요즘 어떤 노래가 유행인지 알아?” 이러고저러고 쫑알쫑알 떠드는 모습은 아기 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몸에 있던 몽고반점만 조용히 자리를 옮겨갔다.  

그 작은 반점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색깔도 많이 흐려졌다. 그동안 엉덩이에서 허리로 등으로 자리를 내어준 몽고반점. 


나에게 우리 아기 인증 점이라고 떠들게 했던 그 몽고반점이 자꾸 나를 떠나려 한다.  

아이를 씻길 때마다 나의 눈길을 붙잡던 퍼런 멍. 그 멍이 뒤덮고 있던 아기의 몸은 그 후 몇 배로 커졌다. 내 품에 안고 씻길 수 없을 만큼. 그 작은 아기는 여전히 내 가슴에 있는데도.

모든 것이 그립지만 다행이다. 이제 내 딸은 모든 말들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누구에게도 푼수로 보일만한 아기 짓은 하지 않는다. 


만약 몽고반점이 자기 비율대로 몸과 같이 자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목욕탕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두드려 맞았다고 오해를 받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가던 중 자연스레 자리를 내어 준 몽고반점. 나도 이제 슬쩍 내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나 보다. 이번 주말에 딸아이랑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숙제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단다. 


나는 속으로만 말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구랑은 잘만 만나더니...’  조금 서글퍼진다. 

이제 딸과 팔짱 끼던 자리마저도 내어 주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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