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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19. 2019

매일매일이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내일 아침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꽃다운 나이인 20대 초반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있었다. 내 직업이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혼의 울림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 첫 직장이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니.


그때는 우리나라에 직업 종류가 적었다. 게다가 딸만 다섯인 집에서 등록금이 무료였던 교대는 나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원치 않는 대학에 들어가니, 내 모습이 마치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직전 같았다.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공부로 밤을 새우고 싶은.


당시 교대는 졸업과 거의 동시에 발령이 나곤 했다. 이 사실이 마치 살찐 귀부인이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 비스듬히 턱을 괴고 누운 모습을 연상시켰다. 학교 커리큘럼은 초등학생에게 공부를 쉽게 가르치기 위한 여러 가지 교수법 등이었는데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거의 꼴찌로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았는데 첫 발령지는 강화도 바로 앞, 리 단 위의 아주 작은 시골 동네였다.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큰 이슈가 되었었는데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다. 예를 들어 어느 시골학교에 발령받은 초임 여교사가 학교 숙직실에서 국졸인 마을 영농후계자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어쩔 수 없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남편을 공부시켜 대학까지 졸업시켰다는 현대판 평강공주 신화가 전해지.


당시 자취했던 시골집은 방문에 새끼손가락 크기의 걸쇠를 거는 게 안전장치의 전부였다. 지정학적으로도 불안한 곳이었다. 아침마다 북한 쪽에서 확성기로 들리는 구호와 대남선전을 라이브로 들었다. 나에게 모닝콜이었던 셈이다.


근처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북한이 보이기도 했다. 당시 그 동네엔 누구누구가 납북되었다는 둥 확인할 길 없는 말들이 떠돌기도 했다. 당시 최은희 씨와 신상옥 감독의 납북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때라 꽤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내가 여배우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기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교부임을 축하하는 방송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마을 절반 이상이 간첩이라는 살벌한 이야기도 돌았다.


주민 대부분은 인삼을 재배했다. 다들 동트자마자 일어나고 저녁 8시만 되면 온 마을이 통행금지 분위기였다. 저녁엔 가로등도 다 꺼져서 서울에 갔다가 일요일에 늦게 자취방에 들어갈 땐 랜턴을 들고 집을 찾아가야 할 정도였다. 젊은 남자, 젊은 여자는 온 마을에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고령화 면에선 일본을 훨씬 앞질렀던 마을이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한번 외출을 나오기가 힘들었다. 하루에 시외버스를 두세 만 운행했으니. 일 차선 하나여서 막혔기 때문에 3~4시간 이상이나 걸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건 일제 강점기 같은 교직문화였다. 당시 교대에서는 졸업 성적순으로 자동 발령이 났다. 그 학교는 원래 신규가 발령 나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마지막 꼴찌 그룹에서 1등이었다. 1등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발령이 났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특지 역이란 위험한 지역을 가리켰다. 몇 년 만 근무하면 그 대가로 금방 교감으로 승진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교감이 되려는 선생님들이 신청을 해서 몇 년씩 자리가 날 때만을 기다렸다. 자연히 다들 교장선생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분위기여서 삐딱한 나로선 숨이 막혔다.


게다가 교장선생님은 청소선생님들을 잡았다. 방문 온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이곳이 진정 학교인가, 호텔인가?”하면서. 이래저래 첫날부터 줄곧 어떻게 하면 여기를 살아 나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게다가 내 교실이 학교 사회에선 풍수 지리학상 가장 안 좋았다. 교장실 바로 옆이었던 것.


교장선생님은 곧 정년퇴직을 하시는 분으로서 까다롭고 깔끔하며 소음을 싫어하셨다. 그런데 나는 갓 발령받아온 신입교사로서 둔하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나의 존재는 교장선생님에게 골칫거리였다. 교사회의 때 아이들을 실내 정숙시키라고 하시는 훈계는 바로 나한테 하는 말씀이었다. 또 특별구역 담당 청소 지도를 잘하라는 말 또한 나에게 대놓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급기야는 수업시간에 불쑥 들어오셔서 청소 상태가 이게 뭐냐고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혼내셨다. 무엇보다 주번 교사가 되면 죽음이었다. 나는 낙엽 성수기 때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게 해달라고 나무 앞에서 빌고 또 빌었다. 만약 가을에 운동장에 낙엽이 한 장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오헨리의 단편소설《마지막 입새》가 떠올랐다. “나뭇잎아, 제발 내가 주번을 할 때까지만이라도 붙어 있어 주겠니?”하면서. 이해가 안 되었다. 떨어질 낙, 나뭇잎 엽 아닌가? 아니면 엄하게 나무더러 경고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무야, 너의 떨켜를 그렇게 우후죽순 작동하면 안 돼. 날 잡아서 한방에 끝내야 해!”라고.


쌀한 어느 날이었다. 발령난지 겨우 1년 3개월 만에 교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진 후 경제적으로 추운 날들을 오래도록 견뎌야 했다. 그 후 내가 그토록 목말라했던, 생동감 있고 창의적인 일이 뭐가 있을까를 알아보았다.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건축 설계 일에 매력을 느꼈다. 곧바로 건축학원에 등록하고 건축기사 자격증 등을 땄다. 그리고 취직이 되었는데 과연 쌩 고생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모 건설회사 회장이지만 그 당시 빌라 몇 동을 지어 팔던 분의 10층짜리 건물을 지을 때였다.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살벌한 추위에 나는 호이스트(건설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건축물 감리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위험천만했다. 건설경비를 아끼느라 외벽에 소위 현장 용어로, ‘비계’(외부 작업용 비계)에 외부 지지대와 외부 보호막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한 번은 10층에 먹줄을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날 하마터면 10층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목공 반장님이 먹줄 놓는 줄을 잡아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했는데 좀 더 뒤로 가라고 하는 말에 내가 거의 건물 끝부분까지 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만약 그때 반장님의 외침이 없었다면, 내가 한 발자국만 밖으로 더 내디뎠다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고생들이 신이 났다. 남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 건축회사 설계직 월급은 차비 수준이었다. 그나마 회사 사정이 나쁠 땐 몇 달씩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고 디자인하는 순간을 즐겼다. 영혼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들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다.  온갖 잡다한 일들을 내가 도맡았지만 늘 웃고 다녔다. 특히 행복했던 순간은 내가 직접 디자인한 도면을 들고 현장 감리를 할 때였다. 그 감리 결과로 공간이 새 몸을 얻었을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러다가 나중엔 해외에까지 나가서 사업을 하기도 했다. 또 얼마 후 금융위기를 맞아 지옥을 맛보기도 하며 누가 도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안정적인 교사를 그만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하지만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을 믿었다. 그 결과 잘 살게 되었다고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많은 경험은 사람을 자신감 있고 관대하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까짓 고생을 한 것쯤 후회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위기에 부딪히면 해결하면서 그 순간들은 내게 더 충만한 감정을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인생의 굴곡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것들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있어 좋은 재료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책을 쓰더라도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젊을 때부터 나는 죽는 순간을 미리 상상하곤 했다. 한 신문기사를 접하고 나서다. 이브 몽탕이라는 프랑스 국민 배우 죽음에 관한 기사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내 인생에 후회란 없다. 해보고 싶은 것 다 해 보았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명성과 부를 다 얻었기 때문이다.” 노래, 춤, 연기 등 재능이 많았으며 사랑도 많이 받은 배우다운 말이다.


또 있다. 바로 밑의 동생을 준비 없이 잃고 나자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된다.


지금 당장 죽으면 누가 힘들까? 어떻게 하면 안 힘들게 할까? 지금이라도 사랑한단 말을 해야 하나? 등등.


죽는 순간에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걸 많이 보아왔다. 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나의 장례식에는 누가 와줄까? 이런 생각들에 미치면 한 순간도 허투루 살 수가 없다.


죽는 순간, ‘매일매일 생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서 깊이 호흡하며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일부러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깊은숨을 들이마시면서 나에게 하는 질문이 있다.


그건 '내일 아침 일어나지 못하고 인생이 이대로 끝나도 좋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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