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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21. 2019

'악의 평범성'을 물리치는 방법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인류가 시작된 이래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유태인 학살은 너무 심했다. 히틀러의 광기도 그렇지만 그 광기에 동조한 선량한 시민들. 그 시민들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지나친 평범함은 손쉽게 악에 물든다.


오래전 영화 '뮤직박스'에서는 유태인 전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홀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나 변호사로 성공한다.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 변호를 맡게 된다. 아버지가 나치 전범으로 기소되어서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죄를 주장하고 딸은 재에서 승소한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전범이라는 사실을 알되고 결국 아버지를 고발한다.  


평소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딸을 사다. 하지만 무고한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전범이라는 사실은 그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자기에게는 사랑을 주었지만 타인에게 만행을 저지른 아버지에게서 개인을 초월한 양심이 작동한 것이다.


양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직업이나 환경을 초월한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 말이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 전체를 놓고 볼 줄 아는 눈. 만약 그녀가 '악의 평범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끝까지 눈을 감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깊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착한 사람을 무시하는 을 들을 때이다.


몇 년 전 5학년 담임을 할 때였다. 그 나이에는 여학생들이 또래문화를 중시하면서 끼리끼리 노는 경향이 심해진다. 간혹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소극적이거나 어두운 성격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순수하고 착한데 아이들과 울리기 든 경우다.


그런 경우 안타까운 마음에 간섭을 하게 된다. 하루는 반에서 가장 인기가 있고 기가 센 여학생을 불러서 그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아이 재미가 없어서 싫단다.


내가 말했다.

"그래도 청소 봉사도 제일 많이 하고 친구들에게 물건도 잘 빌려주고 하잖아. 일단 착하잖아."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착한 게 뭐가 좋은데요? 그냥 걔 성격이니까 그렇죠."


착한 게 그냥 성격이라니.

그럼 자기는 성격이 이기적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인가?

 여학생은 그나마 자기 주관이 있어서 그 친구를 따돌린다. 가치관이 바뀌면 달라질 수도.


항상 평범한 아이들이 문제다. 리더 격인 아이가 따돌리면 덩달아 따돌리는 것. 자기 생각이 없다. 대세를 따를 .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이 어느 순간부터 놀리는 말이라는 것을 안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다. 심지어 형제들도 나를 이용하였다. 내가 엄마를 도와서 설거지를 많이 하니 언니가 내 생일날 선물로 수세미를 선물해 준 것이다.


화가 났다. 나는 양심에 따라 엄마를 도운 것뿐인데... 설거지가 취미도 아닐뿐더러 생일선물로 수세미를 준다는 말은 앞으로도 계속 자기들은 안 하고 나만 설거지하라는 말이다.


친정엄마는 그럴 때마다 착한 사람은 끝이 있어도 악한 사람은 끝이 없다는 말로 위로하셨다. 그 말도 어느 순간 곡해되어 들다.


착한 것은 왜 바보처럼 취급되기 쉬울까? 나는 사실 착한 것이 아니었다. 독서를 즐기다 보니 정언 명령을 따른 것뿐. 


진리가 말하는 명령, 즉 남을 돕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는 것,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 등 말이다. 그런데 책을 잘 읽지 않는 다른 형제들은 그런 명령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매일 텔레비전에 나오는 만화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만 보니 말이다.


매스미디어의 맹점이다. 대중의 평균적인 애호의 기준에 따른 창작물들은 대개 일회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래야 눈길을 끄니까.


예를 들어 광고에 지나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과 멋지게 차려입고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어느 것에 눈길이 갈까?


당연히 소비지향적이고 이기적이고 소위 간지가 나는 삶이 더 눈길을 끈다. 방송에 중독이 되면 이기적이고 소비적이고 얕은 재간에 휩싸이기 쉽다.


매스미디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요즘 텔레비전을 없애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대신 거실을 책장으로 채우고 독서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독서가 사람에게 어떻게 양심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는지 잘 나타난 영화가 있다. '더 리더'이다. 이 영화에서는 먼저 인문학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헤어진 후에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역사가 나오고 끝에 가서는 인간의 원초적인 양심이 어떤 결정을 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악의 평범성'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에 대한 처방전을 내어 놓는다. 인문학을 섭취하라고. 바로 독서를 통해서다. 또한 경고한다. 인문학적인 지식을 단순히 교양을 쌓는데만 쓰지 말라고. 실천을 위한 땔감으로 쓰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감옥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책들을 읽게 되면서 양심이라는 것에 눈을 뜬다.


문제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반드시 양심을 일깨우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인문학을 허공에다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대학 간판을 따려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공부하고 담을  쌓고 살듯 말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가족이 그렇다. 그들은 지식인이다. 그래서 문학적 교양을 쌓는데만 골몰한다.


그 결과 고상하 이기적이다. 진리의 실현, 사회 정의 실천 따위엔 관심이 없다.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데만 혈안이 되어있을 뿐.


여주인공 한나 무념으로 인한 악의 평범성에 노출되었다면, 남자 주인공 가족들은 또 다른 악의 평범성에 노출된다. 바로 이런 '엘리트주의'다.


책은 많은 것을 준다. 한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고귀한 정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구다. 단 제대로 활용할 경우다.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른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죽음을 통해 보여준 그다. 마치 인문학은, 시는, 지식은 이렇게 활용해야 하는  것고 보여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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