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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짱! 조선 두부의 비밀

전쟁과 외교를 넘나든 두부 한 모의 놀라운 여정

by 김형범

어느 날, 명나라 황제가 환하게 웃으며 두부 한 모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게 조선에서 만든 두부인가? 어찌 이렇게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는 감탄이 가득했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두부의 명성은 단순한 소문이 아닌, 황실의 공식 요청으로 이어졌습니다. 명나라 황제는 환관을 조선에 보내 "두부 장인 좀 보내주시오!"라는 칙서를 내리기에 이릅니다. 오늘날로 치면 중국의 국빈 요청 같은 상황이었죠. 조선의 두부가 그만큼 특별했던 겁니다.


지금은 흔한 음식으로 여겨지는 두부가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식탁 위에 당당히 올라가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백성들은 어떤 고난을 겪었을까요? 조선 두부의 숨겨진 비밀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조선 두부의 명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428년, 조선의 사신 성달생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의 요리사가 명나라 황제를 위해 만든 두부가 황실에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 조선 두부의 독보적인 맛에 감동한 황제는 해당 요리사를 황실 요리 관청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조정에 전해졌고, 조선의 기술이 명나라 황실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소식에 조선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황제는 그저 맛있다고 칭찬하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6년 뒤, 다시 환관 백언이 조선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손에 칙서 세 통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의 내용이 놀라웠습니다. “조선의 두부 기술자를 보내 주시오.” 이건 그냥 부탁이 아니라 '칙서'였기 때문에 조선 조정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시의 두부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국가의 기술력으로 인정받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조선의 두부가 왜 그렇게 특별했을까요? 조선의 두부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뿐만 아니라 만드는 기술도 정교했습니다. 콩을 불려 갈고, 고운 천으로 걸러내는 과정에서 특유의 섬세함이 더해졌고, 적절한 온도와 압력으로 두부의 식감이 결정됐습니다. 오늘날처럼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두부는 더 정성스럽고 특별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조선 두부의 영광이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두부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합니다.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구원병들의 식량이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는 중국에서 군량미를 가져오지 않고 조선의 현지 자원으로 식사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명나라 병사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갔습니다. 이를 본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안정적인 식량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군사들의 식단에도 "두부"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인들에게 지급할 식단을 고급 장교, 하급 장교, 일반 병사로 나누어 기준을 정했습니다. 고급 장교에게는 고기, 채소, 두부, 밥, 술 3잔을 줬고, 하급 장교에게도 고기와 두부가 포함된 식단이 제공되었습니다. 심지어 일반 병사들에게도 두부가 지급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직접 두부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바쳐야 했던 겁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명령이었죠. 백성들은 명나라 군사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공급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조선의 두부는 또 다른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일본 고치 지역의 명물로 유명한 "당인 두부"의 기원이 바로 조선의 두부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쟁 중에 일본의 고치 영주였던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조선의 병사와 장수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끌려간 인물 중 한 명이 박호인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진주성 전투나 웅천(지금의 진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인물이었는데, 일본 고치로 끌려가게 됩니다. 조소카베는 그에게 두부를 만들게 했고, 박호인이 만든 두부는 일본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맛이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죠.


고치의 영주는 박호인에게 두부 제조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하며 '두부 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쉽게 말해 두부 공장을 만든 것입니다. 이곳에서 만든 두부가 오늘날 일본의 고치 지역 특산물로 남은 "당인 두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당인(唐人)'이란 외국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외국에서 전해진 두부'라는 뜻이죠. 박호인은 1617년 조선통신사의 협력으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만든 두부의 흔적은 일본에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조선의 두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숨결과 사람들의 눈물이 느껴집니다.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았던 두부의 맛, 전쟁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희생, 일본 고치의 명물로 남은 당인 두부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의 역사를 넘어, 국가의 기술력과 백성들의 고난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조선 두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외교의 무대에서는 조선의 기술력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음식이었고, 전쟁의 현장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을 위해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려 만들어야 했던 고난의 음식이었죠.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가 만든 두부는 일본의 특산품으로 남았습니다. 그야말로 두부 한 모에 조선의 영광과 고난, 그리고 교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것입니다.


세 줄 정리

1. 조선의 두부는 명나라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아 황제가 직접 두부 기술자를 요청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2.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군사들의 식단에 필수로 포함되었으며, 백성들이 그 두부를 만들어 바치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3. 일본의 고치 특산물인 "당인 두부"의 기원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박호인이 만든 두부로, 일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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