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자의 반격으로 탄생한 도덕의 계보
금욕주의는 오랜 시간 동안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인간은 본능을 억누르는 존재이며, 쾌락을 거부할 수 있는 자만이 윤리적 질서의 중심에 설 자격이 있다는 신념은 수천 년 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니체는 이 오래된 도덕의 구조를 정면으로 해체한다. 그는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책에서 금욕주의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것은 병든 의식, 약자의 원한에서 태어난 왜곡된 가치 체계라는 것이다.
니체는 묻는다. 왜 인간은 삶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 도덕을 만들었는가? 왜 쾌락과 욕망을 죄악시하고, 고통과 절제를 선(善)으로 여기는가? 그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강자의 삶에 복수하기 위해, 약자들이 만든 도덕이기 때문이다. 억눌린 자들은 직접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힘 있는 자는 나쁘고, 고통을 견디는 자는 착하다'는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원한(ressentiment)의 도덕'이다.
성직자는 이 도덕을 퍼뜨리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금욕을 통해 자신이 삶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고, 세속의 힘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억눌린 욕망과 증오가 가득하다. 니체에게 성직자는 욕망을 없앤 자가 아니라,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 표현하는 자다. 그가 외치는 고결함은 억눌린 에너지의 방향 전환일 뿐이며, 삶에 대한 부정이자 복수의 형태다.
니체는 금욕주의가 ‘삶을 긍정하는 철학’이 아니라, ‘삶을 부끄럽게 만드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욕망, 본능, 육체—all of these—는 삶의 자연스러운 힘인데, 금욕주의는 이것들을 병적인 것으로 몰아가며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미워하게 만들고, 고통을 찬양하게 하며,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죄처럼 여기게 하는 도덕. 니체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니체가 쾌락을 무작정 추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 욕망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끌어안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존재가 되길 원했다. 그는 그런 존재를 ‘위버멘쉬(Übermensch)’라 불렀다. 위버멘쉬는 금욕도 향락도 아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기준으로 삶을 긍정하는 자다.
니체가 말하는 금욕주의 비판은 단순히 성직자나 종교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따르고 있는 ‘고통이 미덕이다’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왜 견디는 사람을 존경하고, 즐기는 사람을 의심하는가? 니체는 묻는다. 당신이 믿고 있는 도덕은 정말 당신의 의지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원한과 두려움이 만든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둔 것은 아닌가?
금욕주의는 오랜 시간 도덕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뿌리는 삶에 대한 복수였다. 고통을 미화하고, 욕망을 거세하며, 생의 에너지를 부정하는 그 구조는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거기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고통을 숭배하지 말고, 삶을 긍정하라고. 그것이 진짜 철학이고, 진짜 자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