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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사람을 살리다

인신공양의 야만 속 피어난 혁명

by 김형범

혹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문명'이라는 것이 한때는 가장 잔인한 야만과 싸워 얻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주 오래전, 인류는 자연의 힘 앞에서 무력했고 그 두려움을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달래려 했습니다. 특히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해가 닥치면,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풍습이 만연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잔인했습니다. 한자를 보면, '피 혈(血)'자는 제기에 담긴 사람의 피를 본떴고, '백성 민(民)'자는 두 눈이 멀게 된 노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제물로 바쳐지는 이들은 두 눈을 멀게 한 뒤 무릎을 꿇리고 밧줄로 묶였습니다. '묘(卯)'라는 글자처럼 사람을 세로로 두 동강 내는 형벌도 있었다고 하니, 그 야만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인신공양 풍습은 중국 위나라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특히 황하의 신에게 처녀를 바치는 의식은 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반복되었죠. 이때 서문표라는 한 유학자가 위나라 업 땅의 책임자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인신공양을 막기 위해 무당과 그의 제자들이 벌이는 제사 현장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모두가 신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서문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섰습니다. 그는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보며 "이 처녀는 아름답지 않으니, 무당 당신이 직접 강물 속 신에게 가서 다음에는 더 예쁜 처녀를 데려오겠다고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무당은 당황했지만, 거역할 수 없어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무당이 돌아오지 않자, 서문표는 이번에는 그녀의 제자들을 차례로 강물에 던지며 "너희가 가서 무당에게 돌아오라고 재촉하라"고 말했습니다.


서문표의 이 행동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 아래 자행되던 야만적인 폭력을 논리적으로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인간의 목숨을 바치는 이런 행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서문표는 인신공양 풍습을 완전히 뿌리 뽑았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제사를 지내는 대신 대대적인 수리 시설 공사를 벌여 황하의 범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이처럼 유교는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대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워 수많은 인명을 구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혁신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유교가 당시 엄청나게 혁신적인 사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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