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에서 필수가 되기까지, 한국 영어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를 넘어, 개인의 경쟁력이자 세상을 향한 창으로 여겨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알파벳을 익히고, 수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에 매달립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너무나 당연하게 스며들어 있는 영어를 보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와 영어의 첫 만남은 언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놀랍게도, 우리 역사에 기록된 영어와의 첫 만남은 소통의 성공이 아닌 단절을 알리는 한마디였습니다. 때는 1816년, 충청도 마량진 앞바다에 낯선 서양의 배가 나타납니다. 호기심과 경계심 속에 배에 오른 조선의 관리 앞에 선 영국인 함장은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종이에 한 줄의 문장을 적어 건넸습니다. "I don't understand one word you say." 소통의 불가능을 알리는 이 역설적인 문장이 바로, 한반도와 영어가 맺은 기나긴 인연의 첫 페이지였습니다.
소통의 불가능을 알렸던 이 어색한 첫 만남 이후, 영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더 이상 영어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영어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기호가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나라의 운명을 지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생존의 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영어는 소수의 지식인과 외교관을 위한 특별한 언어였으며, 근대화를 향한 열망과 불안감이 동시에 담겨 있는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영어는 또 한 번 그 의미를 바꾸게 됩니다.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고 우리말마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영어는 민족의 저항 정신과 세계를 향한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영어는 억압된 현실을 넘어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희망의 언어였습니다. 이러한 열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도 있습니다. 1935년,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영어 교사의 부정확한 발음에 불만을 품고 ‘진짜 영어’를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벌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좋은 발음을 배우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 일본을 거치지 않은 채 세계와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해방과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에 영어가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군의 주둔과 원조 물자는 영어를 생존과 직결되는 실용적인 언어로 만들었고, 이 시기를 거치며 영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의 언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 성장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영어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수출만이 살길이었던 우리에게 영어는 세계 시장의 문을 여는 열쇠였고, 더 나은 삶과 성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발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영어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매달렸고, 영어 실력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습니다. 문법과 독해 위주의 입시 영어는 많은 이들에게 영어에 대한 부담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에너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소통의 단절을 알리며 우리에게 처음 도착했던 영어는 이제 시대를 관통하며 그 의미를 끊임없이 바꿔왔습니다. 처음에는 오해와 경계의 대상이었고, 근대화의 도구였다가, 저항과 희망의 언어로, 그리고 생존과 성공의 열쇠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영어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며,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가장 보편적인 매개체입니다. 1816년 마량진 앞바다에 떠 있던 그 막막함에서 시작된 영어와의 인연이, 이제는 전 세계인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현재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지난 200여 년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세계와 관계 맺으며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역사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