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옷만 고집한 우리 민족 이야기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길거리 풍경입니다. 화려한 색색의 옷보다는 온통 검은색, 흰색, 회색 등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조차 흰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룹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무채색만 입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길 법합니다. 단순히 유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뿌리 깊은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무채색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래전 19세기,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흰옷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무채색 사랑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부여와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에서 흰빛을 숭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 민족은 주변국들 사이에서도 흰옷만 입는 '백의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흰옷을 입고 다니니, 통치자 입장에서는 신분 구별이 어려웠고, 백성들이 같은 옷을 입고 똘똘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왕이 흰옷 금지령을 내렸는데, 대조 7년에 "회색과 흰색 옷은 모두 금단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고, 대종 1년에는 "백색 의복을 금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연산군, 현종, 숙종, 영조, 고종 등 많은 왕이 여러 차례 흰옷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 또한 모두 백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왕들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민족의 흰옷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일본은 우리 민족이 같은 옷을 입고 뭉치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옷을 바꾸도록 통제하려 했습니다. 일본이 강제로 옷을 바꾸려는 '변복령'을 내리자, 이에 맞서 울미의병이 일어났을 정도로 옷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착은 대단했습니다. 이후에도 일본은 색깔 옷 입기 운동을 펼치고, 심지어 흰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에게 먹물을 뿌리거나 시장 출입을 금지하고 벌금을 물리는 등 온갖 탄압을 가했지만, 우리 민족의 무채색 사랑은 절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무채색 사랑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고유한 정체성이자, 외부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일상의 옷차림이 단순히 미적 취향을 넘어 민족적 자존심과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고집스러운 사랑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 왕이 있었는데, 바로 세종입니다. "지금부터 직무가 있는 인원 외에는 흰옷을 금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며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 것은, 몇 세기에 걸쳐 이어진 전통과 저항의 역사가 DNA처럼 우리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