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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자루로 만든 드레스: 대공황 시대의 비밀 패션

밀가루 포대가 가장 '힙'했던 시절, 가난이 만들어낸 눈부신 디자인 혁명

by 김형범

만약 검정고무신이라는 만화를 기억하신다면, 기철이가 밀가루 포대로 교복을 만들었다가 등에 희미하게 '거북표 밀가루' 로고가 남아 망신을 당하는 에피소드를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화 속의 이 에피소드는 가난했던 시절의 낭만적인 창작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현실이었습니다. 바로 밀가루 포대 옷(Flour Sack Clothes)의 이야기입니다.


이 흥미로운 패션 트렌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이라는 혹독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주식 시장이 붕괴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많은 미국 가정은 기본적인 옷감조차 살 여력이 없었습니다. 돈은 없지만 옷은 필요했던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밀가루, 사료, 설탕 등을 담아두던 튼튼한 면직물 포대였습니다. 당시 포대는 싸구려 면 소재였지만 옷감으로 쓰기에 충분했고, 생필품을 사고 나면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귀한 '공짜 원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포대자루를 깨끗이 빨아 머리와 팔, 다리 구멍만 뚫어 아이들에게 입히거나, 정성스럽게 재단하여 앞치마나 원피스 등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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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포대자루가 옷감으로 활용되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밀가루를 파는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투박했던 포대자루가 소비자의 수요에 발맞춰 진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분업체들은 여성 고객들이 자사의 밀가루를 선택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포대의 질을 높이고, 아예 예쁜 무늬와 다양한 색상을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꽃무늬, 기하학 패턴, 동물 그림 등 당시 유행하던 원단 디자인이 포대 위를 수놓았고, 로고는 비누나 물로 쉽게 지울 수 있는 잉크로 인쇄되거나 포대 안쪽에 숨겨졌습니다. 이제 주부들은 밀가루를 구매할 때 내용물보다 포장지, 즉 '원단'의 디자인을 먼저 살피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밀가루를 사면 옷감이 딸려오는, 일석이조의 소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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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포대 옷은 대공황을 넘어 2차 세계대전으로 물자가 더욱 부족해지자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포대 옷은 검소함의 상징이었고, 솜씨 좋은 주부들은 이 한정된 원단으로 얼마나 멋진 옷을 만들어내는지 경쟁하듯 뽐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명 백화점에서도 포대로 만든 주방용품을 판매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밀가루 포대는 단순한 포장재가 아니라, 힘든 시기를 헤쳐나간 사람들의 실용적인 지혜와 창의적인 디자인 정신이 응축된 '밀가룩(Mill-Look) 패션'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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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포대 옷은 1950년대 이후 종이 포장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명품 브랜드나 국내 기업들이 밀가루 포대 디자인을 차용한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출시하고 인기를 끄는 현상은, 결국 가장 절박했던 시기의 재활용 정신과 그 디자인의 매력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얻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궁핍했던 시절, 한 봉지의 밀가루 포대에서 옷감과 디자인을 발견하고 삶의 활력을 얻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절약을 넘어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인간의 끈질긴 창조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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