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삶의 기록이었다.
수년전, 나의 은사는 나에게 ‘눈이 좋으니, 비가 좋으니’ 물었었다. 나는 단연코 ‘비가 좋습니다’ 말했다. 은사는 나에게 ‘너는 성숙한 아이구나.’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나는 십여 년이 흐른 뒤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조금 더 성숙해졌던 20대 초반 무렵이던가, 비가 오는 어느 날, 미친년마냥 뛰어 다녔다. 비를 맞으면서 뛴 곳은 아주 언덕이 높은 곳이었고, 그래서 하늘과 내가 매우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곳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 보겠다며,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모두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이었다. 그를 붙잡아야 했다. 비를 강렬히 맞으면서 이루어진 첫 성숙한 선택이었다.
그 뒤로도 비가 오던 날에는 비가 나를 훤히 적셔, 많은 표정을 잃게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엔,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비가 억수같이 내리면, 검은 옷들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우산들을 겨우 들고, 고개들을 떨어뜨렸다. 그런 이유 이외에도,, 비가 오는 날엔 머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얼굴에 비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렌즈에 물방울들로 가득 차 시야를 차단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가 중력을 쫓도록 땅을 처박아 숙여야만 했다.
먼 옛적, 비가 내리는 날, 지렁이의 죽음과 빗길의 고통사고와 젖은 자전거가 처량해지는 날엔 그런 날에도 머리는 숙여져야 했다. 친구의 죽음을 목도할 때에도, 누군가를 뿌리 칠 때에도, 그와 나눴던 포장마차 풍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머리칼이 촉촉이 젖을 때에도.
그런 날엔 중얼거려야 했다. 다짐해야 했다.
노란 리본 나부낄 때에는 파리에서 총격전이 있을 때에는 그럼에도 삶은 그저, 그저 흘러가더라도.
비는 전혀 사랑스럽지 못했고 후회처럼 밀려와 자주 깨닫게 앓게 했다.
비가 오면 내 생각이 난다던 당신은 이미 훌쩍 떠나버렸다. 마지막 섹스순간에도 비는 내렸고, 간절히 기도하고 바랐던 모든 순간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구호라던가, 세월호의 아픔 속에서도,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비가 생각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식탁을 ‘탁’ 손가락들로 내리쳐야 했다.
이슬비 여우비 모다깃비 가랑비 보슬비. 내리는 수많은 비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 수많은 물방울 중 내 몸에만 맞닿은 녀석들을 발견하기까지, 그렇게 하찮은 인연놀음에 치중할 때에도, 그것들을 알아차리기 까지, 영혼의 민낯이 드러나기까지에도
비극적이게도 비는 계속 내려버렸고 내 기억 속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나를 뒤덮었다.
그러나 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야했고 그래야만 했고 그래야 했고..
그래서 더더욱 내 머리를 조아리게 했고, 고개를 숙이게 했고, 중얼거리게 했으며, 나를 뒤덮어서 앓게 했다. 혼미하게 했다.
그러므로 비는 삶의 기록이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내가 비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쏟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