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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팡이 Feb 24. 2016

21. 사랑하지 않았던 당신과 헤어졌다.

어떤 여자가 연락이 왔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의 시작이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닮고 싶은 부분이 많았던 사람이었으니까,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정말 후회하는 건 다른 대목에 있었다.


  우리가 절실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서, 사랑해 라는 말에 온갖 물음을 던졌음에도, 이 모든 일들을 간과한 채 무책임하게 서로에게 수도 없이 내뱉었다.

 절실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사랑이라고 포장했고 스스로 아팠했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저 시에 언급된 것처럼 라디오를 끄고 켜는 것처럼 아주 단순했고, 가벼웠으니... .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어디서나 행복해요. 저도 어디서나 행복하게 살게요,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서로 몰랐던 것처럼 그렇지만 아주 친절을 베풀듯이 웃으며 지나쳐요."라고 .


들리지 않는 당신에게, 기도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우리의 시작도 돌리고 싶을 만큼 당신이 싫어졌다.



  급하게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 공부핑계로 몇가지 팽겨쳐둔 곳에서 자그마치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보낸 이야기였다.

  메시지는 조심스러웠고 단단한 결심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드워드 전 여자친군데요. 몇가지 물어볼것이...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정확히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확인한 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나와 그녀에게 괜한 일을 들추어 내는 건 아닐까, 더욱이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기에 망설여졌고...

하지만 그녀의 말투엔 담담함과 애달픔이 품어져 나왔고 이는 나를 사로잡아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했다.


  나와 그녀의 대화는 참으로 놀라웠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sns에 나오는 나쁜 남자와 관련된 단어들이 마구 떠올랐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미친 놈이!!


  손은 덜덜 떨렸다. 확실히 모르는 편이 약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자의 적은 여자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작은 논리인데, 적어도 그 당시 나는 그녀의 적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불쾌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꾸역꾸역 용기를 내어 연락한 일은 예전에 나또한 느껴본 적이 있는 감정이라 더욱 미안했다.


  이제는 미운 감정도 없는 그 사람에게서, 우린 참으로 잘 헤어졌구나.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하루쯤 지났을 땐, 인간의 도리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에대해서, 그래서 마구마구 그사람의 인생에 오지랖 넓게 잔소리하고 싶어졌다. 동정에서 나온 마음이었다. 이것이 세 번째로 내가 느낀 감정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땅으로 추락했다. 추억은 오해로 가득차, 퍼즐처럼 맞추어져 폐물(廢物)이 되었다.

  앞으로 함께할 사람들과 다가올 내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가슴 한 켠의 작은 자리조차 그들에게 내어 주기를 염려할까 걱정되었고,

  그래서 내 사람들에게 너무 너무 미안해서 오랫동안, 자주, 문득 눈앞이 뿌여졌다.
손톱을 자주 물어뜯어 버렸다.


"도리도리 까꿍", 우리나라 만큼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고 들었다. 바로 인간의 도리이다.

  비단 이런 일에 인간의 도리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 나역시 달갑지 않지만
이같이 작고 협소한 소중한 일에까지 도리가 없다면 그럼 세상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한참을 쫓다 보면 과연 나라는 사람도 정말 도리있는 인간인가에 대해 반추하게되고,



  그러니 나는 여전히,
인생에서 아픈 장면을 자주 찾아내어 당신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혹은 아무도 해당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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