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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미 Nov 23. 2022

이발사의 요술거울

ep.131 Mandy Moore - I See the Light

어느 날, 왕이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말을 처음 입밖에 낸 사람은 왕궁의 이발사였습니다.

“그래, 임금님께서는 어떤 분을 왕비로 맞이하길 바라시던가?”
“물론 아름다운 분이시겠지? “

사람들은 자기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이발사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니라네. 임금님께서는 왕비가 될 아가씨를 고르는 일을 내게 맡기셨다네. “
“뭐라고? 어째서 자네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셨지?”

“그것은 내게 요술 거울이 있기 때문일세. “


어린 시절, 집에서 오분 거리 읍사무소 내엔 마을 도서관이 있었다. 작은 읍의 도서관 치고는 제법 규모가 컸다.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하던 서예 교실이 끝나면 동생과 도서관 소파에 앉아 종일 동화책을 읽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번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주구장창 읽는 타입이었는데, 아직도 제목부터 표지 그림까지 생생할 만큼  특히나 자주 읽었던 책들도 있었다. 여러 동화를 모은 15권짜리 시리즈로,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던 책은 빨간 표지의 <이발사의 요술거울>.

국내 출판사가 번역한 해외 동화였는데, <백설공주>나 <잭과 콩나무>처럼 유명한 동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 가끔 친구들에게 그 동화를 아는지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그게 뭐냐는 반응이었으니.


오랜만에 집에서 안 읽는 책들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불현듯 그 동화책들이 떠올랐다. 구글을 샅샅이 뒤져, 이미 15년 전쯤 절판된 그 책을 중고로 파는 곳에서 웃돈을 주고 주문했다.

며칠 후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책이 집으로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 박스를 뜯고 소파에 앉아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요술 거울? 그게 대체 무슨 거울인가? “
”그러니까,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사람이 무언가 나쁜 짓을 했으면 거울 속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있단 말일세.
임금님께선 그 거울에 비춰보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겠다고 하셨네. “

”쳇, 세상에 그런 거울이 어디 있담! “
사람들은 이발사가 허풍을 떤다며 흉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그 이발사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겠다고 찾아오는 아가씨는 없었습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만약에, 갑자기 유퀴즈에서 출연하라고 섭외가 오면, 너 나갈 거야?”


처음엔 다들 당연한 거 아니냐며 출연을 (누가 섭외한 적은 없지만) 기꺼이 승낙한다. 유느님을 볼 수 있는 기회잖아. 야, 유퀴즈면 당연히 나가야지.


“유퀴즈에 나오는 순간, 이때까지 네가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티비에서 너를 보게 되는데 괜찮아?”

이 질문에서 반 정도가 ‘아, 생각해보니 안 나가는 게 낫겠다’고 대답하고 출연을(역시 누가 섭외한 적도 없지만) 고사한다.


“그 사람들 중 몇 명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댓글을 달러 달려올 텐데, 괜찮아?”

그럼 남은 출연 예정자들(역시 절대 섭외당한 적은 없지만) 중 절반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한다.


“아니다, 그냥 안 나갈래. 나”


“아직도 왕비가 되고자 하는 아가씨가 없습니까?”
“네, 아직 없습니다.”
이발사가 민망해하며 대답했습니다.

”순진한 시골 처녀 중에는 거리낌 없이 거울을 들여다볼 아가씨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시골 처녀를...“
”상관없소. 농부의 딸이든 양치기의 딸이든, 그대의 거울을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는 맑은 아가씨라면 나는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겠소. “

왕의 명을 받고 이발사는 말을 타고 시골로 갔습니다. 만나는 아가씨마다 왕비감을 고르는 기준을 설명하고 아가씨들에게 왕궁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시골 아가씨들도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며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가상 섭외 질문에 사람들이 사뭇 진지하게, 또 그리 다르지 않게 반응한다는 건 흥미롭다.

사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유퀴즈요? 다른 프로는 몰라도 유퀴즈면 나가야죠. 근데 방송 후에 댓글창 괜찮을 것 같냐고요? 어...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냥 유느님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전과가 있어서 도망을 다니고 있다거나, 어둠의 조직이나 학교폭력 같은 것에 얽매인 사람들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스멀스멀 그런 생각이 번져가는 것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 한 번 안 남기고 살아왔던가? 에이, 뭘 그 정도를 지금까지 맘에 담아두겠어? 그런데... 그 사람한테는 그게 평생의 지울 수 없는 상처라면?


요술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나타날 것들이 두려워지다가, 결국은 차마 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거울상에서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함께 거울을 보고 있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들통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험한 산길을 올라온 이발사에게 마른 빵과 치즈를 내온 양치기 아가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양치기가 왕비가 된다는 건 가당치 않아요.”
“다른 걱정은 말고, 거울을 볼 자신은 있습니까?”

“물론 저는 거울을 보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아마 모두가 이 동화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듯, 이발사의 요술 거울은 그냥 평범한 거울이다.

결국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착하게 살아온 양치기 소녀는 거리낌 없이 요술 거울 앞에 서고,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거울상을 마주한다.

착하고 순수한 왕비를 찾던 왕은 양치기 소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청혼을 받은 양치기 소녀는 왕비가 되어 왕과 행복하게 산다.



다들 겁이 많아서 그래. 그냥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왕비가 된다는데.

나 같으면 눈 딱 감고 그냥 한번 서봤을 텐데. 이상한 게 나오면 그냥 도망가버리면 되지!

거울을 보고 서 있는 예쁜 양치기 소녀의 그림 때문에 더 좋아했던 이 동화를 읽으며, 어린 나는 이발사의 요술 거울 앞에 서 있는 상상을 했었다.


어느새 왕비가 되기엔 사뭇 많은 나이가 된 지금, 요술 거울은 커녕 유퀴즈 출연도 식은땀이 삐질 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눈 딱 감고 그냥 한번? 미안한데 그것도 살짝 어려울 것 같아. 이상한 게 나오면 도망가기도 전에 아무도 못 보게 거울을 깨버릴지도 몰라.


미안하다. 왕비는 다음 생에 되어볼게.



https://youtu.be/ILRs2r6lcHY


오랜만에 어릴 때 좋아하던 동화책들을 다시 만나게 돼서 즐거운 한 주였어요. 그래서 오늘의 수플레는 따뜻한 동화에 어울리는, 제가 좋아하는 디즈니의 <라푼젤> OST를 소개해봤답니다.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즐겁게 읽던 기억만은 선명했던 동화들이었는데, 다시 펼쳐보니 내용부터 그때 이 동화를 읽으며 들던 생각마저 다시 몽글몽글 떠오르더라고요.

예전엔 읽고 싶어도 누가 빌려 가버려서 못 빌렸던 책들을, 이젠 비싼 돈을 내고 중고로 사서 우리 집 책꽂이에 꽂아둘 수 있게 됐으니, 겁 많은 어른이 되어도 좋은 점은 있네요.



자, 여기 이발사의 요술 거울이 있어요. 거울 주변엔 거울 속 나를, 아니 거울 속 내 얼굴에 떠오를 무언가를 지켜보려는 사람들이 서 있어요.


거리낌 없이, 아니 그냥 눈 딱 감고,

요술 거울 앞으로 걸어가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나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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