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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Nov 09. 2023

에메렌츠 앞에 서면 나는 투명해진다

<도어> 서보 머그더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생각한 지 오래되었다. 꿈을 향한 날갯짓을 멈추면서 꿈은 헛것이 되었다. 간혹 꿈을 꾼다. 꿈을 꿀 때면, 나는 무엇이든지 된다. 손끝에 닿을락 말락 했던 꿈이 이뤄져 그것에 놀라서 깼을 텐데, 꿈을 꾸는 순간만큼은 놀랍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내가 원하는 꿈이 이것이었구나. 그 꿈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내가 꿈꿨던 것보다 훨씬 잘 짜인 풍경을 생각하는 동안 애꿎은 땀만 식어간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밤의 마력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밤은 모든 것을 어둠에 묻는, 감추는 존재가 아니다. 보여주는 존재다.


서보 머그더의 장편소설 <도어>는 일생 동안 육체노동을 해온 노년의 가사도우미 에메렌츠와 그보다 스무 살 어린 중년 작가인 화자, 두 여성의 우정과 파열의 기록이다. 에메렌츠는 자신이 섬길 주인과 급료를 자신이 결정할 만큼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규정에서 자유롭다. 내가 하려면 의식적으로 강제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이 에메렌츠에게는 자연스럽다. 스미듯 왔다가 온전히 물러나기에 무심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밤처럼 에메렌츠 앞에 서면 나는 투명해진다.


에메렌츠는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 에메렌츠는 소설 속에서 자신과 대비를 이루는 화자에게 호칭을 쓰지 않는다. 어떤 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파악 없이는 그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는다. 에메렌츠는 ‘나는 누구다’라고 스스로 규정한다. 그래서 에메렌츠는 모든 관점에서 완벽하고, 지독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하다. 더러운 속옷은 절대 빨지 않으며, 자신의 노동에 대한 주위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수행한 성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지한다.


에메렌츠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활성화하는 새로운 원소처럼 발한다. 에메렌츠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화롭게 생동한다. 내 그릇으로는 예측할 수 없기에 에메렌츠의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나무속에 파묻혀 씨름하는 나에게 산 전체를 보여주고, 끊임없이 나를 혼란 속으로 던져 넣게 한다. 에메렌츠는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도 그 어떤 곳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아무리 신중해도 결국 내 삶의 한 부분이 되고, 그 한 부분을 잃으면 도려진 흔적의 더미 속에서 더 많은 에메렌츠를 만나게 한다. 주위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고 절망에 빠뜨리는 사람이다.


사람 관계에서 황금률은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상대를 대접하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면 상대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한 단계 더 진보하여 상대가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백금률이라고 한다. 자기를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고 지위나 역할 내지는 외양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밖에 드러난 것, 장식적인 것에 더 집착하기도 한다. 에메렌츠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대접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그것을 정확하게 아는 에메렌츠 사이에서 수많은 무례와 거절, 갈등이 벌어진다. 그 모든 혼란을 무시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대접하는 것이 에메렌츠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절실한 무엇을 에메렌츠를 통해서 깨닫는다. 에메렌츠가 끓여 온 음식을 맛보고서야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식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결국 에메렌츠가 옳음을 사람들은 나중에 이해한다.


에메렌츠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시간적으로 딱 들어맞고, 상황적으로 딱 들어맞고, 가치적으로 딱 들어맞는, 즉 중(中)이 구현된 자리에 에메렌츠는 서 있다. 에메렌츠는 어려서 두 동생과 부모를 잃었고, 일을 견디어 낼 수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어린 나이에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하도록 내던져졌다. 전쟁과 궁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다. 에메렌츠가 겪은 불행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었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 내면서 키운 자리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에메렌츠는 능력자라는 껍데기를 벗고 강박과 집착이 얽매인 평범한 사람이 된다. 에메렌츠의 내면은 철문처럼 도어(문,門) 뒤에 갇혀 있다. 동생들을 앗아간 천둥 번개는 에메렌츠를 과거 그 지점으로 돌아가게 한다. 문 앞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자유의지로 문을 열고 나오게끔 지켜봐야 하는데 눈앞에 현실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문은 부서지고 에메렌츠는 배신감을 느낀 채 허망하게 무너진다.


“아주 예리한 칼로 사람의 심장을 찌르면 그 사람은 바로 쓰러지지 않는다.” 에메렌츠를 무너뜨린 칼은 부메랑이 되어 배신자들의 심장을 향한다. 심장을 찔린 사람들은 점점 동요할 것이고 그들도 언젠가는 쓰러질 것이다. 다만 에메렌츠가 남긴 유산은 무엇이었을까? 에메렌츠는 자신을 찌른 예리한 기억과 상처들을 끝까지 견뎌냈다. 그 힘은 서로가 고통을 나눠 갖는 이해의 시간에서 나왔고,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우정에서 커졌다.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그림자 같은 친구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오늘 밤은 꿈꾸고 싶다.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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