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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11. 2023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은 빛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여기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옳은 길만을 선택하는 감각으로 균형 잡히고 현명한 가정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여자가 있고, 남편의 외도와 가족을 위해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적 틀 안에서 자신을 잃고 투명해지는 여자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자기 꼬리를 문 뱀처럼 한 여자의 삶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심리학책에 나오는 그 사례처럼 비극을 향한 정규 코스를 경험하게 한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알지 못하고,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아는 순간 더 이상 구원을 바라지 않는 삶의 모순 앞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19호실을 찾고 있다.


수전과 매슈는 모두 아는 것 많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정원이 딸린 리치먼드의 집에서 네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두 사람이 일찍이 바라던 것, 계획했던 것 모두 손에 쥐고 있었다. 선견지명과 현실적인 분별력 덕분에 두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부관계가 정형화되면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마저 미리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지적인 결혼생활의 뚜렷한 특징인 건조하고 통제된 동경에 대해서도 대체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려면 치러야 할 대가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활을 고통스럽고 폭발하기 쉬운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 지성(知性)을 동원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평생 충실할 수 없다는 것도 수많은 책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정작 남편 매슈가 부정을 고백했을 때 수전은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수전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자신을 달랬다. 지성은 재빠르게 싸움, 삐치기, 분노, 속으로 침잠한 침묵, 비난, 눈물을 금지했다. 감정을 억누르는 감옥살이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지적인 사랑이 떠받치는 자신들의 대단한 생활을 생각하여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두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건지는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막내 쌍둥이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두 사람의 결혼생활 중에 처음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전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진정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수전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크고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없는 것 같아! 수전은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일 바쁘게 할 일을 찾아냈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 수전은 자신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끼고 있음에 당황했다. 집에 아이들이 없는 시간 동안, 그녀는 아이들이 항상 옆에 있을 때보다 더욱더 바쁘게 지냈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앞으로 5주 동안 집에 혼자 있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수전은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잊지 말고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분노가 그녀를 잠식했다. 그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프레드 호텔 19호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하루였지만, 사흘로 다시 닷새로 늘려갔다. 수전은 자신을 대신해서 집의 안주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세웠다. 매슈는 자신의 역할을 거부하는 수전에게 그 역할을 수행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매슈는 오래전부터 착한 남편이자 책임 있는 아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어느새 닥쳐오는 일들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19호실은 수전이 완전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내 엄마라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1년 남짓 되었을 때 남편이 19호실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매슈가 찾고 싶었던 건 어떤 수전이었을까? 매슈가 19호실을 알아낸 순간부터 19호실에 머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수전, 그녀는 침대에서 우묵한 곳을 찾아 몸을 굴렸다. 남편의 몸이 누워 있던 자리로 손을 뻗어보았다.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아는 순간이었지만 수전은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 <병원>에도 아픈 여자가 나온다. 아니 아픈 ‘나’가 나온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그 자리에 누워본다.


가 누웠던 그 자리에서 ‘나’는 위안을 얻었을까? 도리스 레싱의 <19호실을 가다>는 위안을 주는 소설이 아니다. 처음 책을 읽고 나니, 내 지성(知性)은 수전의 삶을 피상적으로 대하라고 부추겼다. 빨리 책을 덮어라.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 수전이 죽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이 걸어간 길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다시 읽으면서 괴롭게 물결치는 감정의 결에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아내의 눈물 앞에서 나도 매슈처럼 피상적이지 않았는지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레싱이 묘사한 수전의 감정의 흐름은 그만큼 완벽했다. 그리고 절박했다.


19호실, 어두운 실내로 길고 깊은 한 줄기 빛이 파고든다.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는 자기가 아주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하루 시간 속에 무심히 자리할 뿐이다.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은 빛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아침 햇살, 에드워드 호퍼,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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