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 국제갤러리, ~5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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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마가 지층을 뚫고 솟구친다. 고치를 뚫고 나온 나비는 하늘로 날아간다. 봄 새싹은 동토(凍土)를 비집고 나온다. 경이로운 순간이다. 거대한 무엇을 뚫고 나오는 장면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그 행위 자체에 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나 단서도 없이 무의식의 짙은 어둠을 뚫고,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 기억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 삶의 진실을 암시한다. 일상의 삶은 이상과 현실이 엇갈리고, 말과 행동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그래서 진실과 마주하는 일은 불편하다. 진실은 아무리 가두고 밟아도 꿈틀댄다. 맥락 없고 떠오르고, 그것이 무엇이든 뚫고 나오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캔버스에는 아교를 입힌 후 바탕을 입히거나 애벌칠용 석고를 바른다. 이렇게 표면을 강화하면 특유한 천의 조직감이 드러나지 않고 물감 역시 천에 스며들지 않는다. 캔버스는 그 자체로 소통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정작 캔버스와 물감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천은 천대로, 물감은 물감대로 서로 각자의 길을 갈 뿐이다. 안과 밖, 앞면과 뒷면, 현실과 이상, 캔버스와 세상, 사실과 진실이 서로 소통하기에 캔버스는 부적절한 공간일까. 그래서인지 어떤 화가는 캔버스를 칼로 찢고선 ‘공간의 확장’을 말했다.
형체가 없는 물감은 마치 바람 같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 나무에 부딪힌다. 바람은 나무의 흔들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사물은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 놓일 때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온몸으로 부딪혀 서로를 쓰다듬고 지나치면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 성근 마대와 물감의 접합, 그 과정에서 물질 본연의 성질을 극대화함으로써 확장되는 회화의 외연, 화가 하종현이 평생을 바친 예술 세계다. 하종현은 평면에서 사라진 촉각의 세계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원했다. 집요한 노동이 빚어내는 내면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접합〉은 지난 50여 년에 걸쳐 하종현을 대표하는 연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작가는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두터운 물감을 바르고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으로 평면에 공간의 개념을 부여했다. 성근 마대 뒤에서 물감을 밀어서 나오는 표정들이 볼만하다. 솟았다 이지러지길 반복하며 캔버스 위에 입체감을 만든다.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자잘한 알갱이들의 표정은 제각기 생동한다. 마대의 성질도 살리고, 형체가 없던 물감도 자신을 드러내고, 작가의 행위까지 어우러져, 개별과 전체는 조화롭게 순환한다. 나는 지금 성근 마대를 뚫고 나온 자연의 진실 앞에 서 있다.
회화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단번에 깨버린 작가 하종현 개인전 《Ha Chong-Hyun》이 국제갤러리에서 5월 11일까지 열린다. 이번 개인전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 아래 반세기에 걸쳐 유화를 다뤄온 하종현의 지속적인 실험과 물성 탐구의 현주소를 조망하는 자리다. 기존의 〈접합(Conjunction)〉 연작과 여기서 비롯된 다채색의 〈접합〉, 제스처의 자유분방함과 기법의 자연미를 강조하는 최근의 〈접합〉, 그리고 2009년부터 시작된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연작 등 2009년부터 최근까지의 작품 30여 점을 통해 쉼 없이 진화 및 확장하고 있는 하종현의 작업 세계를 일괄한다.
'Conjunction 23-74' 2023 Oil on hemp cloth 162x13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색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반영된 다채색의 〈접합〉에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붓 터치(mark-making)와 함께 밝은 색이 섞인 그러데이션이 강조된다. 기존 〈접합〉 연작에서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색상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다채색의 〈접합〉에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일상의 색상을 사용했다. 과거 기둥 형상의 수직적인 제스처에서 벗어나, 〈접합〉 신작인 〈Conjunction 23-74〉(2023)에서는 자유분방하지만 사전에 계산된 듯한 미묘한 사선 형태의 붓 터치들이 캔버스 화면을 가득 메운다.
'Conjunction 24-52' 2024 Oil on hemp cloth 130x9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또 다른 〈접합〉 신작인 〈Conjunction 24-52〉(2024)는 마포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이 앞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접합〉 초기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초기작에서 자연의 흙색을 사용한 것과 달리 신작에서는 그러데이션을 이용해 흰색을 보다 세련되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점성 있는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부각해 물감이 지닌 물성을 더욱 강조했다.
'Post-Conjunction 09-339' 2009 Mixed media 74x92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Post-Conjunction 09-339〉(2009)는 "만선(滿船)의 기쁨"을 희열에 찬 원색의 화면으로 표현한 〈이후 접합〉 연작이다. 나무 합판을 일정 크기의 얇은 직선 형태로 자른 후 그 개별의 나무 조각을 일일이 먹이나 물감을 칠한 한지, 광목천, 마대 천, 캔버스 천 등으로 감싸는 작업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이 나무 조각들을 화면에 순차적으로 나열하는데, 틀에 하나의 나무 조각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유화 물감을 짠 다음 또 다른 나무 조각을 붙여 물감이 나무 조각 사이로 눌리며 스며 나오도록 하는 일련의 방식을 반복한다. 하종현은 이렇게 스며 나온 물감 위에 스크래치를 하거나 유화 물감으로 덧칠하는 등 화면에 리듬감과 율동감을 더한다.
※ 근처 아트선재센터에서는 하종현이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1959년부터 〈접합〉 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의 초기 작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개인전 《하종현 5975》가 진행 중이다. 일생에 걸친 여정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는 《하종현 5975》는 4월 20일까지 진행된다. 본 글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