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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an 16. 2021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진실한 이별은 만남이어야 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서 ‘기억이라는 실재를 담고 있는 시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사유습니다. 불충분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에 기반한 현재의 나. 새로운 사실이 우리를 엄습했을 때, 우리는 자연이 뒤집히고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상황에 겨워, 사람에 겨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겨워 풀지도 맺지도 못한 채 망각에 묻어버린 매듭은 강물이 역류하듯 돌아와 나와 다시 대면합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는 내내 ‘기억이라는 실재를 담고 있는 공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포르투갈 여인을 도와줍니다. 그녀의 포르투갈어에 꽂힌 그는 서점에서 포르투갈 관련 책을 찾다가 아마데우 프라두가 쓴 에세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마데우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자기 인생에서 도망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필요했던 겁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우리는 거치는 곳마다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온 흔적들의 합입니다. 흔적을 찾는 여행이란 결국 그 합인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나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흔적을 모아 나를 재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흔적의 똬리를 풀어 평생 만나지 않을 기찻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원류에 닿지 않을까요? 그렇게 때 묻지 않았던 내 본연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아니, 최소한 내가 남긴 흔적을 왜곡 없이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의도치 않게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주 열차를 떠올렸습니다. 어느 역에다 나를 내려놓고는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나는 열차였습니다. 내가 흔적을 남겼던 수많은 역은 어느새 퇴색한 간이역과 폐역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역 말입니다. 물론 추억할 시간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차여행은 곧 기억 여행이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기차에서 추억이라는 감성적 이미지를 제하면 기차는 한번 타면 다음 역까지 내릴 수 없는 무쇠 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역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역에서 내릴지 여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여행을 계속할지 그만둘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하자, 기차가 아니 무쇠 방처럼 매정한 운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다는 것마저 자각하지 못한 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무섭게 내달리는 고속열차와 내면으로 회귀하는 완행열차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시선의 방향이 정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기에 내 안에 너무나 많은 나를 만나는 여행이지요. 그렇게 역에다 남겨 놓은 흔적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 무엇보다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 책에서 자주 발견했습니다. 나만 유별나게 구는 것 같았는데 동행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지금 내가 나를 잃으려나 보다.’

‘아버지를 환자로 보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하는 환자로. 그건 아버지가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나는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진실한 이별은 만남이어야 했는데’

‘삐걱거리며 차가 움직이는 이 시간은 오로지 그만의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왜 창문이 하나 깨져야만 내가 당신을 다시 열린 시선으로 보게 되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어느 지점부터 아마데우와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나를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같이 길을 걷는 동행이었죠.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느꼈던 망설임은 내 안의 진실을 맞이하기 위한 잠깐의 숨고름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가족 및 지인들과 만남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갑니다. 김영탁은 <곰탕>에서 ‘인생 하나가, 지 혼자 망쳐지나’라고 했지요. 아마데우라는 인생 하나는 아마데우 지 혼자 채운 게 아닙니다. 아마데우를 둘러싼 관계를 재구성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삶에서 풀지 못했던 매듭이 자연스레 풀리는 경험을 합니다. 삶에 너그러워졌다고 할까요? 리스본에서 보낸 시간은 자기 영혼의 떨림에 따라 행동하고, 현재의 나로부터 온전히 나를 지키고, 열린 시선으로 관계를 다시 바라보고, 떠난 흔적들과 진실한 이별을 하는 연습 무대였습니다. 그래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시작한 여행은 외롭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여행을 통해 재구성한 삶의 기억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 마음속 어두운 공간에 울긋불긋 등이 하나씩 켜지는 풍경 아닐까요? 이제 내가 기차를 탈 차례입니다. 바람만 불면 부대끼며 울어대던 내 속에 너무 많은 나. 역에 내리면 꼬옥 안아주려고 합니다. 기차표를 발권할 순간은 언제일까요?

'꼭 요란한 사건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을 결정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고 삶에 온전히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에 고결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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