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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깡의 짜투리 Dec 13. 2024

잠깐. 희망퇴직 신청의 기록

희망퇴직 후 시간의 흐름대로 생각과 일상을 남기고 싶었으나 공지부터 퇴사날까지. 남기고 싶은 기록이 있어 잠깐 시간을 거슬러 본다.


“여러분, 회사는 여러 지표를 개선해 보려 노력하였으나 불가피하게 체질 개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글로 시작되는 90년대 편지지 같은 이미지의 공지사항. 모든 직장인이 기분 좋을 금요일 아침이었다.


2주간의 희망퇴직 신청 기간이 있었고 신청 기간이 끝나면 퇴사까지는 또 2주, 총 4주 한 달의 일정이었다. 주요 프로젝트의 기간이 한 달이라니 이럴 때 회사는 영혼의 속도까지 내나 보다.


희망퇴직 공지 직 후에는


캔틴이든 화장실이든 출입문 앞이든 2명 이상 모이기만 하면 서로의 생각을 묻기 시작했다.


“넌 어떻게 할꺼야?”

“누구님, 혹시 고민 중이세요?”

“대상이야? 대상 아니야?(입사 2년 이하는 대상 제외) 그럼 고민도 없네”

“신청할 사람 있을까? 지금 밖에 겨울이야”(라고 하면서 이 분은 신청했더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파악하기 바빴고

‘너의 인생 주체적으로 살아라’라고 머리에 때려 박던 교훈은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 내 옆에 앉은 동료가, 앞뒤의 동료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최우선 정보가 되었다.



공지 1주 차 후반에는


세금은 정확하게 몇 프로 뗀다더라 신청 안 하면 이런 일들이 실행 된다더라 등 희망퇴직 보상에 대해 철저한 분석 지표가 공유되고 이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퍼지기 시작.


여전히 삼삼오오 모였지만 양상은 조금  바뀌는데


하나. 희망퇴직 신청서를 낸 사람 이름이 하나둘씩 거론되며 다들 절대 비밀! 너만 알고 있어 쉬쉬.(그렇지만 비밀이야 말로 직장에서는 제일 빨리 나눠 먹는 사탕이다.)


둘. 절대 나가지 않겠다 혹은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없다고 일찌감치 결정한 그룹은 이 전과 같이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하루를 시작.


셋. 눈만 마주치면 물어봤던 질문은 이제 비슷한 나이와 성별, 기혼자 미혼자 및 자녀유무 등 나의 비슷한 사람들의 의견만 묻는 것으로 세분화되었다.



2주 차에는

매일 신청한 사람들의 이름이 추가되었고 특히 열심히 일 하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과 유달리 회사에 애정이 투철한(회사에 대한 애정이 ‘정치’로 나오는)사람들이 신청하면 1초 만에 소식이 퍼지기도 했다.


“너에 대한 걱정으로 하는 말인데”

“넌 지금 회사에서 위치와 인식을 보면 신청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멘트로 ‘걱정’이라 하면서 ‘훈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신청한 사람 수 이름이 복리 이자처럼 매일 많이 들리게 되는 시기.


이때 부터 점심과 커피는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신청한 사람과 안 한 사람 나눠 먹는 것으로 분위기가 형성 되었는데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들은 괜히 안 한 사람과 밥을 먹다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봐 우려했고 신청하지 않는 사람은 괜히 한 사람과 밥을 먹었다 남은 미래를 걱정할까 우려되어 자연스레 그룹이 나눠지게 된 것이라.  


정확히 2주후 금요일에는


활발하게 서로 의사를 물어보던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다들 침묵으로 메신저와 시계만 보고 있다가 공지한 마감 시간이 되어 그렇게 끝이 났다.


희망퇴직 신청 기간 종료 후 퇴사 날까지는

특별히 기록할 것이 없다. 인수인계를 하였고 송별회를 하고 퇴사를 했다. 기억에 남는 건 신청자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진짜 행복인지 애써 인지는 본인만 알겠지) 남은 자들은 “엄청 많이 신청했대 “”그 팀은 다 나간대 “라는 소문을 들으며 앞 날을 조금 걱정했다.



몇 개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하나. 번개와 같은 인사팀의 일 처리

“그 사람은 2일 전에 퇴사의사 팀장에게 밝혔는데 이미 HR에서 접수해서 위로금 못 받는대 “


둘. 뜻밖의 타이밍 최적자

“다음 주쯤 퇴사 이야기 하려 했는데 희퇴 한다자나! 완전 럭키비키쟌 “


셋. (고오급 정보 미리 파악하고 다닌) 천년의 준비자

“그러게 미리 준비하시라 했잖아요. “

미리 핵심 정보원들과 만나서 정보를 파악하고 준비한 자. 희망퇴직 공지 날까지 맞춘 사람을 보고 소름.

어디서도 살아남을 분으로 인정합니다.


넷. 급격한 변화인가 거짓말인가

“전 신청 안 할 거예요” 한 것이 마감 2분 전

“신청했습니다..” 한 것이 마감 2분 후


이게 뭐라고 30시간 공부하고 ”넌 공부했어? 난 망했어. 어제 자버렸잖아”를 시전 하나요..



나는 매우 보통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고민하고 번복하고 결정하고 후회하고 마음을 애써 다잡았을 뿐.


평소 그렇게 친하지 않던 분들과

“신청자”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자주 만나고 영혼의 단짝 인 듯이 고민을 나눈 게 평소와 다른 점이었는데


“우리 퇴사하고도 자주 만나!”라고 했지만

예상했듯이 가아끔 안부 묻는 사이가 되었다.

이 역시도 곧 사라질 테지.





“그래서, 지금 시간이 지나고 보니 누가 승리자인가요? 한 사람? 안 한 사람?”

“승리자는 없습니다. ”희망퇴직”은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과정과 결과입니다 “ 가 나의 답변.


모두가 고민하고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각자 살아가게 된다.


아, 퇴사 다음날 처음 한 일은

회사 서비스 멤버십 해제. 지독한 질척 속에서도 꿋꿋이 해제했다.


여전히 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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