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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깡의 짜투리 Dec 22. 2024

드라마틱하지 않음

어릴 때부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보통의 일상을 살면서(어른이 되어서야 매일 같은 일상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게 되었지만)

'환상게임'처럼  책을 펼치면 책 속 이야기 속으로 빠지기를 상상했고 전혀 다른 장소가 펼쳐지길  주문처럼 외면서 교실문을 열었고

시험 전날엔 지금 현실이 너무 싫어 '표류교실'처럼 떠다니는 내일이 되기를 바랐다.


사춘기에는 모든 소녀들처럼

연예인과 운명 같은 만남을 상상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넣어보고자 그들의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것을 상상했는데


그나마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다들 H.O.T의 스타일리스트를 상상할 때 혼자 이문세의 스텝이 되길 희망했다는 것.


전혀 극적일 것이 없는 내 삶에서 항상 극적인 순간들을 바라고 뭔가 계기만 있다면 내 삶은 드라마틱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내 안의 공상가는

'40대의 희망퇴직'이라는 사실을 그 계기로 조금 생각했나 보다.


무인양품에서 무지 노트와 잘 그려지는 까만 볼펜을 하나 샀고 노트에는 '마음 노트‘라는 다소 부끄러운 타이틀을 적었다. 지금의 나는 불안정하고 큰 일을 겪었으며 인생 2막이 펼쳐질 것이야!라고 생각했으니 매일 나의 감정을 기록하면 굉장히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한 현실과 마주칠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 노트‘에 뭔가를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린 지 한 달이 되었으나 첫날과 30일은 놀랍도록 같다.

첫날에 기록한 불안 90% 희망 10%는 여전히 불안 90% 희망 10% 이지만 '그게 뭐 어쩌라고 ‘ 의 상태가 되었다. %는 같을지라도 그 중요도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내 마음은 매일 바뀌지 않았고 2주가 지나고 나니 갑자기 불안과 두근거림이 옅어진 채로 지금의 삶에 적응해 버렸다.

"오늘은 이걸 했다. 내일은 이걸 할 거야"라는 글은 "꼭 뭘 해야 하나. 내일 또 무언갈 하겠지"로 바뀌었다.

포기나 허무는 아닌데, 평온 하지만 뭔가에 매이지 않은 상태.


"놀랍게도 말이지.

너의 뇌는 순식간에 쉬는 것에 적응할 거야."


며칠 전 퇴사하는 팀(이었던)의 막내에게 이 말을 해 주고 ‘불안해하지 마라, 매일의 일상이 바뀌는 것에 지금은 너무 무섭겠지만 나도 그랬다.’라고 했다.



도전이랄 것도 없고

생각보다 내 삶은 드라마틱하지 않았고

조금씩 나아가고는 있지만 똑같은 매일, 하루.


그럼 그렇지.


역시 어른의 '드라마틱한' 것은 로또 밖에 없나 보다.




# 덧 붙이면


거창하디 거창한 내 마음노트는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부끄러운 나의 민낯을 적었는데

어느 날 저녁 딸들이 몰래 보고 있는 것을 발견.

(보지 말라고 그렇게 숨겨 놨는데!)


숨은 독자들을 인지하고 나니


미래의 두려움으로 잠 못 든 나의 뇌 상태는

잠을 잘 자야 쑥쑥 크고 생각도 건강해진다로 바뀌고


100% 날것 그대로의 불안한 심리는

불안함이야말로 발전을 위한 동력!이라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슬픈 사실.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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