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조금은 허무했던 아이트 벤 하두 투어가 모두 끝났다. 짧은 자유시간 동안 각자 흩어져 사진을 찍은 후, 가이드를 따라 마을을 내려왔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몸과 마음이 조금은 지쳐버렸다. 빨리 차로 돌아가 물이나 한 잔 들이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이드를 따라 차로 돌아가는데, 강 위로 세워진 튼튼한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마을로 들어갈 때에는 징검다리를 건너느라 동네 꼬마들에게 팁을 삥 뜯겼는데 말이다. 가이드와 현지 주민들 사이에 은밀한 커넥션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던 순간에 저 멀리서 후다닥 달려오시는 분은 우리 일행 중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할머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할머니를 놓고 떠날까 봐 달려오시는 것 같다. 무릎이 안좋으신지 마을로 향하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며 걸으셨는데, 지금 보니 우사인 볼트 못지않은 달리기 솜씨를 가지셨다.
인원점검을 하며 일행을 기다리는데 누나와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우리 옆을 지나고 있었다.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여자아이가 다가와 대뜸 손을 내민다. 알고 보니 사진을 찍었으니까 돈을 달라는 것이다. 실랑이하기가 좀 뭐 해서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몇 개 쥐여주었다. 모델료(?)를 지불했으니 이제는 사진을 찍어도 되지 않을까? 한 손에는 동전을, 다른 손에는 동생 손을 꼭 쥐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곳 모로코에서는 어린아이들까지 '돈벌이'가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씁쓸했다.
일행들이 모두 모인 후, 차가 출발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우리를 태운 차는 약 10여 분을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 여러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이곳 역시 가이드와 업무제휴를 맺은 곳인가 보다. 식당 입구에는 모로코 주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그냥 지나쳤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보니 어떤 가이드들은 도시를 하나하나 막대기로 찍어가며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아이트 벤 하두 투어를 하는 관광객 덕일까? 식당의 규모가 꽤 크다. 얼핏 봐도 이삼백명을 거뜬히 채울 수 있을 정도다. 1층 메인 식당외에도 사진에 보이는 것 같은 2층 테라스가 서너개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오는 종업원들을 보니 왠만한 프랜차이즈 못지 않은 솜씨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음식 맛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 가이드를 끼고 장사하는 관광지 음식점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맛이다.
식사를 마친 후 찾은 곳은 아이트 벤 하두 인근의 영화 박물관. 박물관 앞에서 자동차가 대기하는 동안 원하는 사람들만 자유롭게 입장해서 구경하고 나오면 된다. 입장료는 60디르함(약 7,200원)에 불과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관람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아이트 벤 하두에서의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도 굳이 안에 들어가진 않고 입구에서 그냥 이런 곳을 왔다는 정도의 인증샷만 찍은 후, 주변을 서성거리다 다시 차에 올랐다.
점심시간 이후로도 한참 동안 차로 모로코 산길을 달렸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황톳빛 풍경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과 나무 한 그루 없는 불그스름한 산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란... 웬만한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차도 사람도 지쳐버린 저녁 6시 반, 드디어 사하라 투어의 첫날밤을 보내게 될 호텔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로비가 깔끔했다. 게다가 2인 1실에 아침저녁으로 밥까지 준다고 한다.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 같아 송구하기도 하고, 뭐 암튼... 배낭여행 중에 이런 투어 상품을 이용하다 보면 확실히 '평소보다 편해짐'을 실감할 수 있다.
일행 중 '유이한' 아시아인이어서였을까? 타츠야라는 일본 남자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콘센트가 각 침대 위에 하나씩 달랑 두 개뿐이다. 짐을 풀고 나서 미리 준비해 간 멀티탭으로 스마트폰과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는데, 옆 침대의 타츠야는 뭔가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멀티탭의 남는 구멍이 있으니 쓰라고 했더니 '아리가토'를 거의 100번은 들은 것 같다. 그래도 하루 동안 여행하면서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는 아직까지 예의를 갖추는 게 조금은 불편하다. 뭐, '역시 일본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충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시간에 맞춰서 식당으로 내려왔다. 호텔이라 그런지 식당도 제법 깔끔하고 분위기가 있다. 장시간 여행을 하고 난 뒤라 그런지 유난히도 배가 고팠다. 일행들이 빨리 내려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식당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리다가 식전 빵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잽싸게 자리로 가서 주섬주섬 빵을 뜯으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오늘의 메인 요리는 꾸스꾸스와 닭고기 따진. 꾸스꾸스는 후~하고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아니 실제로 날아가 버리는 작은 쌀밥에 감자, 호박 등 채소와 고기를 푹 쪄낸 모로코 전통 음식이다. 꾸스꾸스와 따진은 모로코 여행을 하면서 거의 매일 먹게 되는 요리인데, 외국인 입장에서는 뭐가 꾸스꾸스고 뭐가 따진 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도 종종 헷갈리기는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쌀이 있으면 꾸스꾸스, 없으면 따진'이라는 원칙을 세운 후, 이 두 가지 음식을 구분하기로 했다.
함께 여행하는 일행 분들이 대부분 어르신들이어서인지, 식사를 마친 후 다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분위기다. 물론 하루 종일 차를 타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어울려 맥주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좋으련만... 마드리드를 떠난 이후, 혼자 여행을 하느라 말을 할 기회도 많지 않고 외롭던 차에 투어를 하면서 친구를 좀 만들어볼까 했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아...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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