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서른 번째 이야기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또다시 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는 왠지 어제 봤던 것만 같은 풍경들이 지나간다. 분명히 어제 하루 종일 차로 내달렸는데, 아직도 사하라 사막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한다. 약간의 멀미와 피곤함에 어느새 눈이 점점 감긴다. 마라케시에서 시작하는 사막투어는 그야말로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는 모로코의 풍경, 황톳빛 땅과 푸른 하늘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나무가 없어서 활량한 땅에 건물까지 황토색으로 지어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자꾸 보다보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싶다. 나도 모르게 모로코에 정이 들었나보다.
잠깐 쉬어가는 길에 만난 모로코 소년, 곱슬곱슬한 머리에 동그란 얼굴과는 달리 꽤 시크한 매력을 가진 남자아이다.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다가, 사진을 다 찍었다 싶으면 살며시 손바닥을 내민다. 이것이 이곳, 모로코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 형으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아이는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뒤를 돌아본다. 저 때로부터 벌써 1년도 더 지났다. 두 아이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제 봤던 것 같은 곳에 멈춰 사진을 찍고,
어제 지났던 것 같은 길을 지나서,
베르베르족이 모여서 살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모로코에 와서 처음으로 풀과 나무가 무성한 모습을 본 것 같다. 밭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농사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에서 콩, 올리브, 보리 등을 재배한다고 한다. 그나저나 베르베르족은 유목민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짓는다니... 뭔가 미심쩍다. ㅋ
개울가에서는 빨래가 한창이다. 드라마에서나 몇 번 보았지, 실제로 이렇게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아슬아슬하게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의 힘겨운 표정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옷이란 것은 그냥 대충 벗어서 세탁기에 던져두면 되는 줄로만 알았던 내가 잠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전자렌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일수도 있으리라.
가이드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우리가 왜 이 마을에 오게 된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카페트는 모로코 전통 양식으로 사람이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짠 것이라고 한다. 그냥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라며 민트 티도 한 잔씩 가져다준다.
방 한 쪽에서는 장인 냄새 폴폴 풍기는 할머니 한 분이 직접 솜을 골라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실타래를 돌리는 모습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다르게 보면 연출 같기도 하고,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우리를 데리고 온 가이드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이 집 주인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카페트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놓는다. 영어라서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이 곳 모로코는 카페트로 유명한 곳이다. 유럽 각지로 카페트를 수출하는데, 여기서 만드는 것은 100% 핸드메이드다. 외국에서는 엄청 비싸게 팔리지만, 여기서는 저렴한 가격에 팔꺼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따로 가격을 문의해라.' 뭐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는 숙련된 조교와 함께 카페트를 종류별로 펼쳐 보이며, 설명을 한다. 디자인은 어떻고, 촉감을 어떻다는 둥...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한 번 만져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면서 말이다. 나야 뭐 저 무거운 것을 사서 들고 다닐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카페트를 사용할 일이 없으니 별 관심이 없었는데,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꽤 귀를 기울여가며 설명을 듣는다.
주인 아저씨가 카펫을 한 다섯 장쯤 보여줬을까? 드디어 이탈리아에서 온 청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가더니 돌돌 말린 카페트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온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우리 일행들은 하나둘씩 옆방으로 들락날락했고, 주인 아저씨의 얼굴은 점점 밝아져만 갔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한참 동안이나 카페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우리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바깥 공기가 이렇게 상쾌한 줄은 미처 몰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활짝 피어 있었다.
다시금 차에 올라 한참을 달린 후 도착한 곳은 토드라 협곡, V자로 깎아낸 듯한 암벽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는 곳이다. 암벽의 높이는 자그마치 300미터. 아주 오래전에는 이 곳에 물이 가득차서 흘렀다고 한다. 자연의 위대함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자연의 위대함에 도전하는 인간의 용기 또는 무모함도 만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깎아진 듯한 절벽을 오르는 걸까?
암벽을 오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내 옆으로 자전거가 한 대 지나간다. 쫄쫄이를 입고 뒤에 짐을 가득 실은 것을 보니, 꽤 장거리 여행을 하나보다. 저 때로부터 약 1년 전,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자전거로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기분은 어떨까? 작열하는 태양에 모래먼지까지... 모르긴 몰라도 국토종주보다 3배는 더 힘들 것 같다.
이건 2박 3일간의 사막투어를 하면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낡고 허름하지만 앙증맞은 자동차를 타고 토드라 협곡을 누비는 기분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보다 10배는 더 빠르고 재미있을 것 같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우리를 부른다. 이제 출발하자는 말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서는 단체 사진을 찍어야 한단다. 제법 친해진 것도 같은데, 여전히 뭔가 어색하다. 블로그나 카페에 유난히 토드라 협곡에서 찍은 단체사진이 많은 걸 보면, 기사 아저씨의 말대로 이곳이 포토존이 맞긴 한가 보다. 그나저나 우리 팀은 왜 이리 젊은 사람이 없을까? ㅠㅠ
베르베르족 마을과 토드라 협곡을 지나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규모가 있는 호텔인데, 이 곳은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무거운 짐은 차에 두고 물과 잠옷, 선크림 등 필요한 것들만 챙긴 후, 화장실을 다녀오면 사막으로 들어갈 준비가 모두 끝난 셈이다.
마라케시를 떠나 이 곳, 사하라 사막의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32시간이 걸렸다. 지금부터 약 16시간 동안 사하라 사막에서 보내게 될 시간은 내게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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