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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Mar 24. 2021

남편이 다리를 다쳤다

남편의 의미


토요일, 남편이 다리를 다쳤다.

장을 다 보고 물건을 트렁크에 넣는데 갑자기 남편이 넘어졌다.

비가 오던 토요일, 주차장이 미끄러워 발을 헛디딘 것이다. 남편은 발목을 심하게 꺾이며 넘어졌다.


집에 부랴부랴 와서 남편의 다리를 살펴보니, 발등이 심하게 붓고 발등부터 바닥까지 멍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이 너무 아프다며 고통스러워했다. 좀처럼 엄살을 피우는 사람이 아닌지라, 나는 무척 당황했다.

병원을 가야 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 3시 반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검색을 해도 3시 이후에 문을 연 정형외과가 없었다.

결국 나는 119에 전화를 해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정형외과가 아직 진료 중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인대 손상이 심해 남편은 결국 깁스를 하게 되었다.






다리를 다쳐 걷는 자체가 힘든 남편을 대신해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했다.

남편을 부축하면서 걷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키와 덩치가 나보다는 훨씬 커서 부축하고 가려니 등에서 땀이 났다.

일요일 아침, 남편이 약국에 가서 붕대를 새로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밖엘 나왔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연 약국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붕대를 팔지 않았다. 한 군데만 더, 한 군데만 더.. 그렇게 가다 보니 10000보를 넘게 걸었다.

아침 10시에 나와서 12시가 넘어서야 들어갔다. 옷을 대충 입고 나간 데다가, 날씨는 왜 또 갑자기 추워진 건지.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결국 나는 붕대를 넘겨주며 남편에게 짜증을 부렸다. 힘들어 죽겠다고.

남편은 그저 미안해할 뿐이었다.


남편이 다친 지 하루 만에,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걷는 게 힘드니 작은 일 하나까지 다 내 몫이었다. 남편이 화장실이나 다른 방에 갈 때도 내가 부축을 해줘야 하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게다가 일요일은 남편과 오랜만에 꽃구경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다치는 바람에 데이트는커녕 꽃구경도 내년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화가 났다.

남편은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은 느낌. 내 옹졸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월요일에도 연차를 썼고 내 권유로 한의원 치료를 받았다. 한의원도 집에서 아주 가까웠지만, 부축을 하고 가려니 세상 끝까지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음식쓰레기를 가져다 버렸다. 돌아오니 아이가 갑자기 찐만두가 먹고 싶다며, 집 근처 사거리에 있는 단골 만두집을 다녀오라고 투정 부렸다. 나는 또 앉아있을 새도 없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 만두가게에 갔다.

분리수거도 다 내가 해야 했다. 종이부터 캔까지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꽤 많아서 분리수거장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아이 숙제와 공부를 봐주고 세탁기를 돌리며 화장실 청소를 했다. 바닥과 변기를 쓱쓱 닦고 정리를 하고 나오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남편도 긴 하루였겠지. 얼른 자라고 남편을 부축을 하고 침대에 눕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다친 그 날부터 계속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왜 미안한 거지. 다친 게 남편 탓이 아닌데.

똑바로 누우면 다리가 아파서 불편하다고 했다. 새우등처럼 굽은 자세로 잠이 든 남편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야식을 사다 주는 것도, 분리수거를 하는 것도,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도 사실 다 남편이 하던 일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아이가 학교를 매일 가게 된 후 아침에 내가 바쁘다며 침대정리를 손수 해주고, 아침 먹은 그릇을 설거지까지 해주고 출근했다.

매일 집 청소를 하는 게 힘들다며, 화장실만이라도 본인이 하겠다며 한 번도 내게 화장실 청소를 시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출장을 가거나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바깥에 나갔다가 예쁜 꽃이나 풍경이 보이면 어김없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던 사람이었다. 눈이 온다고, 꽃이 폈다고, 하늘이 예쁘다고, 바람이 분다고, 날씨가 따뜻하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는 내 예쁜 사람.

10년을 넘게 그렇게 나를 조용히 도와주고 사랑해주었는데, 내가 아플 때 남편은 늘 몸도 마음도 다 놓고 쉬게끔 배려해줬는데, 나는 고작 하루 만에 힘들다고 짜증을 냈으니. 남편의 넘치는 사랑을 그저 당연하듯이 받기만 했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을 몰랐으니, 나는 참 어리석은 아내였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보다는 불평이 많고, 눈 앞의 힘듦에만 시선을 두고, 타인의 마음 씀씀이는 생각하지 않으며 늘 내가 우선인 이기적인 사람. 퉁퉁 부은 남편의 발등을 보고 있자니 지난날 나의 모습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다 사랑이었는데. 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었는데, 그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굽은 자세로 잠이 든 남편의 모습이 더 애잔하고 미안했던 것 같다.


사랑도 마음도 다 핑퐁처럼 주고받아야 더 단단해지고 커지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주지는 못했다는 것을 왜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달았을까.


잠이 든 남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남편이 간지러운지 살짝 미소를 보인다. 늘 내겐 다정한 사람. 남편이 있어서 나는 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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