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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Apr 02. 2021

100m 원빈과 50m 성시경

사랑이란


내가 고3을 잘 버텨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성시경 때문이었다. 나의 유일한 고막 남친이자 첫눈에 반한 이상형. 미소천사를 부르며 실크 셔츠를 펄럭이며 부끄러운 듯 웃으며 춤을 추던 그는, 정확히 나의 이상형이었다.

목소리 역시 예술이다.

그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 같기도 하면서 겨울이 금방 지나간 봄 같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면 어느새 음악이 들리지 않는 기적을 맞이하곤 했다. (그만큼 집중이 잘 되었다. mc 스퀘어처럼)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땐 아이들 사이에서 cd 플레이어가 유행이었다. 마치 아주 옛날에 “마이마이” 카세트가 유행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용돈을 아껴 cd를 사는 기쁨이 있었다. 친구들과 서로 앨범을 바꿔 듣기도 하고 다 들은 앨범은 원하는 친구에게 그냥 주기도 했지만 성시경 앨범만큼은 절대로 빌려주지도, 당연히 그냥 주지도 않았다.






언니는 지금의 형부와 연애를 꽤 오래 했다. 10년 정도 했는데, 내가 처음 형부와 인사 한 건 고2 때였다.

어느 날 아침,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언니가 살금살금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오늘 야자 째고 내 남자 친구 한번 안 볼래?”

“ 싫은데. 시험이 코 앞이라고.”

시험이 내일모레였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야자를 째라니.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데, 결국 나는 그날 야자를 쨌다. 그 이유는 언니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 내 남자 친구가 원빈을 닮았는데도?”


뭐라고. 원빈을 닮았다고? 세상에 그렇게 생긴 얼굴이 흔치 않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빈을 닮았다고??


“......... 진짜야??”

“ 그렇다니까. 근데 100미터 전에서 봐야 진짜 원빈이야. 물론 가까이서 봐도 잘생겼고.”


100미터 전이라고 해도 가까이서 보면 잘생긴 거 아닌가. 까짓 거 평생 100미터 떨어져서 얼굴 보지 뭐.

그럼 당연히 나가야 한다. 시험공부야 새벽에라도 하면 된다. 암, 그렇고말고.


수업이 끝나고 나는 로켓 발사보다 더 빠르게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세상에 원빈 님이라뇨.


저 멀리 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100미터 전인 것 같은데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봐도 원빈 님이 보이질 않는다. 내가 눈이 나빠서 그런가.

더 가까이 가보았다. 그래도 원빈은 없었다. 대신 얼굴이 까무잡잡한 낯선 오빠가 나를 보고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언니가 원빈이라고 지칭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기긴 했다.

아, 원빈과 꼭 닮은 게 하나 있긴 했다. 머리스타일.


그래도.............


아... 당신이 그... 원빈 님이시군요.

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니의 어깨를 잡아채고 흔들었다.

도대체 원빈이 어디 있었느냐고.

그런데 언니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 원빈 닮았는데?”


그 순간 나는 언니의 두 눈에 깊이 박힌,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하트를 발견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 언니는 내게 진실을 말한 것이다. 그것이 나에겐 아닐지언정 언니에게는 원빈, 아니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 “사랑”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인사시킨 건, 부모님이 아니라 언니였다. 그날도 퇴근 후 언니의 신혼집에 가서 드러누워 있다가 무심히 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 언니, 내가 결혼을 해볼까 하는데... 한번 만나볼래?”


언니는 내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놀란 토끼눈이 되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지,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어디 사는지까지. 나는 차근차근 대답해주고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 언니 그리고 내 남자 친구는 성시경을 닮았어.”


언니가 비웃었다.


“ 너, 내가 형부 원빈 닮았다고 해서 지금 복수(?) 하는 거냐?”

“ 아냐. 진짜 닮았어. 게다가 언니 넌 100미터였지만 난 50미터 전에 봐도 성시경이라니까?”


언니는 “성시경”이라는 말에 돌고래 소리를 내더니, 당장 만나보자고 했다. 너무 궁금하다며.





“야, 예비 제부 참 성격도 수더분하고 좋더라. 엄마 아빠한테도 얼른 인사시켜.  

그런데 말이야..... 성시경 하나도 안 닮았던데! 50미터는커녕 5센티 앞에서 봐도 아니던데.

아, 닮은 거 하나 있었다. 안경.............”


아닌데. 내 전 남자 친구, 현 남편은 성시경 닮은 거 맞는데. 안경을 쓴 것도, 키가 큰 것도, 웃을 때 반달눈이 되는 것도, 머리숱이 많은 것도, 요리를 잘하는 것도, 목소리가 따뜻한 것도.


언니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 아.. 네가 원빈 안 닮았다고 발끈한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오늘 친구에게 결혼을 한다는 따뜻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그 친구의 예비신랑은 300미터 박서준을 닮았단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서 봐야 하는 것인가)

옛날 같았으면 코웃음 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게 사랑이기 때문에.

형부가 원빈을 닮았던 것처럼, 내 남편이 성시경을 닮았던 것처럼, 내 친구도 아마 진심이며 진실을 말한 것일 것이다.

시간은 많이도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형부는 원빈이고 내 남편은 성시경이다.


그래, 그게 사랑이지.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마법.

누가 뭐라든 내 눈에만 예뻐 보이면 그만이다.

팍팍한 삶 속에 이런 “사랑” 하나 없다면 세상 사는 게 얼마나 재미없을까.


모두에게 이런 “사랑”이 내려앉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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