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워드 : 이모 >
저의 조카 중 한 명은 휴대전화에 저를 '마지막 그녀'라고 저장해 놓았다고 합니다.
조카에게 저는 이모 중 막내이모거든요.
오늘은 '이모'라는 키워드로 짧은 글을 써봤습니다.
키워드 : 이모/ 장르: 짧은 소설
가끔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나도, 그 옆의 엄마와 아빠도 모든 게 꿈같았다.
“희수야”
이모를 본 건 거의 6개월 만이었다.
이모는 그사이 부쩍 살이 빠져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낸 거지?”
“응. 이모는? 살 빠졌네?”
“살 빠졌지? 역시 넌 알아보는구나. 살 빠져주니 땡큐지 뭐”
살이 빠져서 그런지, 팔자주름이 깊어진 거 같았고, 새치도 부쩍 늘어 보였다.
하긴, 이모도 50대였다.
“희수야.”
이모가 ‘희수야’하고 부르면, 집중되었다. 왠지 온몸의 세포마저 긴장하는 듯했다.
그 안의 공기마저, 이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그 안의 소음도 모두 차단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모는 목소리가 크진 않아도 말에 힘이 있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이모랑, 여행 가자.”
“갑자기?”
“응. 갑작스럽겠지만, 여행은 자고로 갑자기 가야 제맛인 거잖아?”
이모와 희수가 함께 살 때도 둘은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아니, 가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다. 희수에게 여행은 금기어였다. 발작버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모는 한 번도 희수에게 여행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희수는 어릴 적, 엄마 아빠와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야 한다 했다.
그래야 일상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여행은 그런 역할을 하는 삶의 도구라 했다.
도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위너라 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면 더 즐기는 쪽은 엄마였다.
엄마는 여행을 가기 전까진 매우 귀찮아하는 유형이었다. 가기 전에 일도 해놔야 하고,
짐도 싸야 하고, 번거롭다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당일이 되어 여행지로 떠나는 순간부터 기분이
한층 업되어 있었고, 평소엔 자주 소화불량에 걸렸음에도 여행지에서는 잘 먹고, 소화도 잘 시켰다.
여행지에서 예측불허의 상황과 마주하는 일이 생겨도 엄마는 늘 긍정적이었다.
알고 보면, 엄마는 천상 여행 체질이라고 아빠는 엄마를 그렇게 말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른 듯 닮았고, 쿵작이 잘 맞았다.
그러던 엄마 아빠가 지인의 장례식장에 함께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희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너무 사이가 좋아서 한 날 한시에 떠났나 보다’고 장례식장에 온 누군가는 말했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사이가 좋지 말지. 그런 거라면 차라리...
희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하필, 둘 다일까?
한 명도 모자라, 엄마 아빠를 둘 다 희수의 삶에서 뺏어가 버렸다. 지우기 버튼을 누르듯, 순식간에
희수의 삶에서 제거해 버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나는 그저 초등학교 6학년일 뿐인데'
희수는 자신의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곤, 행여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곱씹어봤다.
아빠에겐 원 가족이 없었고, 엄마에겐 이모와 삼촌이 있었는데, 이모가 희수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친척들은 결혼도 안 한 이모가 희수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선뜻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고마운 눈치였다.
'하긴, 네가 언니를 참 잘 따랐지.'
'걔가, 얘한테 좀 잘했어.'
이모가 희수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유를 갖다 붙이기에 바빴다.
희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훗날 생각해 보면, 자신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자처해 준 이모가 너무 고마웠다.
“이모, 나 여행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근데, 왜...”
“부탁이야. 들어줘.”
이모는 단호했다.
평소와는 다른 이모의 단호함이 낯설고 불안했다.
“희수야. 이모는 엄마 아빠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늘 네 편인 사람이야.
그것만은 변함없는 진실이야.”
희수가 한 번씩, 제 안의 동굴로 숨어버리면 이모는 늘 그렇게 말해줬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네 편이라고.’
그리고, 기다려줬다.
하지만, 이모는 후회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선택을.
희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희수를 사랑해서, 그리고 세상을 떠난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니까 희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는 했지만, 자신이 이모의 걸림돌이 된 거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모마저 자신을 두고 떠날까 늘 불안했다.
엄마아빠가 떠나고 몇 년은 그런 불안 속에서 지냈다.
하지만, 이모랑 사는 건 좋았다. 이모는 일이 늦어도, 꼭 희수와 조금이라도 대화를
하고 싶어 했고, 쉬는 날엔 근처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화장을 하는 주위 아이들을 보고 먼저 화장품을 사준 것도 이모였다.
이왕 화장을 하려면 좋은 화장품을 쓰라며 잔뜩 사주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땐,
이제 어른의 멋을 알아야 한다며 트렌치코트를 사주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둘은 따로 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독립이었다. 적당한 시기를 기다린 듯, 자연스럽게 독립을 했다.
희수도 안다.
이모가 최선을 다했음을.
그런 이모가, 한 번도 희수에게 부탁 같은 걸 하지 않던 이모가 여행을 가자고 했다.
“어디로?”
희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발, 엄마 아빠와 함께 갔던 여행지는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웬만한 곳은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그런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몰랐다.
“제주도. 제주도 가서 비자림도 걷고 싶고, 함덕해수욕장 해변에서 맥주도 마시고 싶어.”
하필, 제주도였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갔던 곳이라, 제주도 곳곳에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 묻어있었다.
“꼭 제주도 가야 해?”
“어, 꼭 제주도여야 해”
“이러는 이유가 뭐야?”
희수의 말에 이모는 말없이 희수를 바라보았다.
“나, 여행 힘들어하는 거 알면서 이러는 이유 말이야.”
“일단 가자. 이모 너한테 부탁한 적 없잖아. 꼭 가주었으면 좋겠어.”
희수는 중학교 수학여행도,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가지 않았었다.
물론, 대학교 M.T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안 가는 거야?’
이모는 쓸쓸한 표정으로 묻곤 했지만, 더 이상의 설득도 충언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 이모가, 이번에는 꼭 여행을 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고 있다.
‘설마, 죽을병이라도 걸린 걸까?’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희수는 차마 그렇게 묻지 못했다.
‘맞아’라고 할까 봐. 물을 수가 없었다. 이모마저 잃을 순 없었다. 언젠가 이모와도 이별을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희수는 불안했다.
“이모가 가자고 한 거니까, 코스랑 숙소, 다 이모가 알아서 할 거야. 괜찮지?”
“응”
희수에겐 큰 결심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탑승부터 지옥이었다.
왜 그렇게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할까.
다른 사람들은 어릴 적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데, 희수는 아니었다.
엄마 아빠와 나눴던 소소한 대화까지 기억이 났다.
4학년 때, 제주도를 갔을 때였다.
아빠는 당직을 하고 온 후였고, 엄마도 밤늦게까지 일을 마치느라, 거의 잠을
못 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의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서울역 방향 노선의 공항철도를 타야 하는데, 반대로 인천국제공항 방향 노선의
공항철도를 탄 것이다.
다행히 운서역에 가서, 우리가 잘못된 노선을 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덕분에 김포공항역에서 국내선탑승구까지 숨이 턱턱 막히도록 뛰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엄마는 입에서 피 맛이 난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너무 재밌다며 웃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심각한 일이 생겨도, ‘내 인생 참 재밌네’ 하는 사람이었다.
4학년 때 이후, 제주도는 처음이었다.
남자친구와 혹은 여자 친구와,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희수만 이방인 같았다. 잔뜩 겁을 먹은. 온통 상위포식자에 둘러 쌓인 어린 짐승 같았다.
먼저 가 있겠다던 이모는 그전에 봤을 때보다 5살은 어려 보이는, 롱 원피스에 카디건을
입고, 히피펌을 하고 서 있었다. 인파 속에서 희수를 알아보는 단 하나의 눈빛.
이모를 발견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건 이모도 마찬가지인 듯, 이모는 희수를 보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희수에게 다가와 희수의 손을 꼭 잡았다.
“어서 와. 환영해.”
이모가 렌트한 차를 타고, 우린 먼저 고기 국수를 먹었다.
고기국숫집에서 비자림, 그리고 함덕해수욕장의 숙소까지.
이모가 짜놓은 여행일정은 4학년 때, 그대로였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숙소에 도착하자, 희수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애써 잊고 지낸 엄마 아빠와의 기억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아우성 댔다.
화장실 물을 틀고, 희수는 울었다. 지금껏 참아왔던 눈물들은 단 한 방울도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고여있던 것처럼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희수는 엄마 아빠가 너무나 그리웠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엄마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 품에 푹 안기고 싶었다.
희수가 울고 있는 사이, 이모는 화장실 문 앞을 서성였다.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고
싶은 걸 참아내는 눈치였다.
얼마나 울었을까. 너무 울어서인지, 배가 고팠다. 이 상황에 뜬금없이 올라오는 식욕이
우스웠다.
“맥주 마실까?”
희수가 세수를 하고 나오자, 희수의 마음을 눈치챈 듯, 이모가 준비해 온 치킨과
맥주를 펼쳐놨다.
갈증이 났던 터라,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런 희수를 보고 마음이 놓이는지 이모가 웃었다.
“맥주 참 맛있게 마신다. 꼭 CF처럼”
“그럼 한 번 더?”
희수의 농담에 이모가 웃었다. 한결 편안해진 미소였다.
“희수야”
희수에게 닭다리를 건네주며 이모가 말을 이어갔다.
“이모, 사랑하는 사람 생겼어. 이모 연애 중이야”
닭다리를 뜯던 희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모를 바라봤다.
“정말이야?”
“응”
“어떤 사람이야? 언제 만났는데? 몇 살이야?”
갑자기 터져 나온 질문들에 희수도, 이모도 웃었다.
희수를 키우느라 연애도 제대로 못 한 이모였다.
“난, 이모가 암이라도 걸린 줄 알았잖아. 갑자기 여행 가자고 해서”
“그랬어? 다행이지? 아프지도 않고, 되려 사랑에 빠졌으니”
“아, 진짜, 다행이다.”
“희수야, 그 사람이 제주도에서 같이 살재. 그래서 제주도 오자고 했어.
너,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여행 안 가잖아. 근데, 이모 제주도로 오면 널 너무 못 보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래서 무리하게 제주도 오자고 했어. 미안해."
희수는 말없이 이모의 말을 들었다.
“희수야. 엄마 아빠를 추억해 줘. 가슴 아픈 기억으로 꽁꽁 숨겨두지 말고.
엄마 아빠와 여행했던 곳에서 새로운 추억도 만들고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가줘.
그리고, 언제든 이모 만나러 와주고. 이모 사실, 너 많이 보고 싶었어 그동안."
“그분, 이모한테 잘해줘?”
“그럼. 잘해주지. 희수 너 보고 싶데. 이모가 그랬거든. 이모한테 1순위는 너라고.
그랬더니 너무 보고 싶데.”
“뭐야. 그런 줄 알았으면 예쁜 옷 좀 가져올 걸”
모처럼 이모는 과음을 했다. 오늘을 잊지 못할 거 같다며 마시고 또 마셨다.
붉어진 얼굴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잠든 이모를 바라보니, 희수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북받쳤다.
이모는 희수를 보통의 아이로 키워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니, 어떤 사랑이었을까?
어떤 사랑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좀 더 이모와의 시간을 소중히 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모와 추억을 더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갖은 후회가 밀려왔다.
희수는 곤히 잠든 이모를 다시 바라봤다. 너무 애틋해서, 그런 이모가 내 편인게 너무 행복했다.
희수는 오랜만에 이모 곁에 누웠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이모는 본능적으로 희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희수 쪽으로 돌아누웠다.
“희수야. 우리 이쁜 희수야.”
이모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며 희수를 꼭 안았다.
아직 술냄새가 났지만, 희수는 피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이모의 품에서 오래도록 이모 냄새를 맡았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밤이었다.
그렇게 까무룩, 언제 잠이 든 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