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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Sep 23. 2024

낚시 가기 좋은 날

< 키워드: 가을비>


얼마 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키워드로 쓰이는 숏 스토리: 가을 비 입니다.


키워드 : 가을비/ 장르: 짧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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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지긋지긋했던 여름도 끝나가는 것일까.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염과 가뭄 속 메말라가던 대지도 비를 기다린 듯 옅은 한숨을 토해내는 듯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비냄새는 오래도록 그리워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듯,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렸다.


올여름은 낚시하기가 유난히도 힘든 계절이었다.

저수지마다 가뭄으로 인한 배수가 심해 낚시할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이 시기에 내리는 비는 분명 호재였다.

뜨거웠던 수온을 식혀줄 뿐 아니라, 수위도 올려주니, 오름수위 찬스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퇴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 달리 석우는 홀로 들떠있었다.

이 상태로 내일까지 비가 내린다면, 주말엔 낚시를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다음 주에 필요한 프레젠테이션 용 제안서는 내일까지 정리하면

될 터였다.

낚시 갈 생각을 하니,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샘솟았다.

오전 내내 석우를 괴롭히던 두통도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

물가에서 대편성을 해놓고, 찌불을 밝히고, 찌멍을 때리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니 즐거워

콧노래가 나왔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눈치 빠른 지영 씨가 말을 걸어왔다.     


“아. 아니에요.”     


석우는 서둘러 일처리를 했다. 잘 써지지 않던 제안서도 술술 써지는 듯했다.

그런데, 뭔가 잊은 듯한 찝찝함이 몰려왔다.

분명, 잊고 있는 뭔가가 있었다.

석우는 다시 스케줄을 확인했다.


‘주말에 뭐가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있는 듯했지만, 머릿속은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일이나 하자.’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석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야근을 했음에도 피로도가 낮았다.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석우는 자연스레 끝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온전히 석우의 취향이 반영된, 석우 만의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낚싯대가 담긴 가방과 받침틀, 간이 의자 등 낚시용품들을 담아놓은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4자를 낚았던 순간이 담긴 사진이 걸려있었다. 작은 책장엔

낚시 관련 책들이 꽂혀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있던 터라, 잘 챙겨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로 쓰는 떡밥은 준비되어 있었고, 지렁이 미끼는 현지에서 구입하면 되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행복해 있던 찰나, 여자친구 영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왔어?”

“어, 방금”

“밥은?”

“이제 먹어야지.”

“음...”     


영서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하기 어려운 얘기가 있을 땐 언제나 ‘음...’하며

뜸을 들이는 버릇이 있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우리, 주말에 말이야. 뭐 하지? 계획 있어?”

“아! 주말!”    

 

순간, 석우는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오후 내내 석우를 찜찜하게 했던 그 무언가가 생각이 났다.

이번 주 토요일은 여자친구와의 5주년이었다.

하지만, 석우는 꼭 낚시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언젠가 영서를 데리고 낚시를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영서는 지루하게 찌만 바라보는 것이 뭐가 재밌냐며, 붕어낚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뒤로 가끔 혼자 낚시를 떠나는 것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오래된 연인이다 보니, 이제는 각자의 취미와 시간을 존중하게 되었다.

주말에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상대가 약속이 있으면, 되려 고마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가 호기라고, 비가 온 뒤의 오름 수위 찬스를 노려야 한다고,

여름이 가기 전에 꼭 한 번, 4자 붕어를 낚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필, 5주년이었다.

5주년,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었지만, 영서는 그것만큼은 챙기고 싶어 했다.

아직 우리 사이가 건재하다는 확신이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점점 서로에게 무뎌지고, 신선함과 긴장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 묵인하고 있었다.     


“어? 잠깐만, 조금만 있다 전화할게.”     


일단 석우는 급한 볼일이 있는 듯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하지?’


이럴 때, 필요한 건 순발력이었다.

하지만, 버퍼링이 걸린 듯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동창 재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창 친구 형철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아! 이거네.’


마침, 장례식장은 낚시 포인트로 좋은 전라남도 쪽과도 거리가 가까웠다.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 앞에서 낚시 생각이라니...’     


순간,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형철이 아버지는 치매로 오랜 시간 요양원에 계셔야 했다. 가족들의 부담도 만만치 않았었다. 연세도 있으시고, 이 정도면 호상이 아닐까? 석우는 자리합리화를 해봤다.

석우는 바로 영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지? 형철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일 내려가봐야 해. 얘기한다는 걸, 제안서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 형철 씨? 아버님이 치매라고 하셨지? 슬프겠다...”

“그러게”

“그럼, 친한 친구니까 발인까지 보고 오겠네.”

“그래야지. 미안”

“뭐, 자기 잘못은 아니니까...”     


영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석우를 짓누르는 듯했다.     


“아, 그럼 나도 같이 내려갈까? 형철 씨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간 김에 근처 들려서

맛있는 거 먹고 오고, 바람 쐬고”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장례식장에 들렸다 낚시를 갈 생각이었던 석우의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수습이 필요했다.     


“형철이가 엄청 고마워하겠다. 근데, 아무래도 발인까지 가야 하고, 형철이도

챙기고 해야 할 거 같은데... 자기 피곤할 거야.”

“그런가... 내가 있으면 오히려 불편할지도 모르겠네. 친구들끼리 있는데.”

“장례식장에 오래 있으면 힘들지. 우리야 뭐 남자고, 친구니까 괜찮은데.

우리 5주년은 다음 주에 챙기자.”

“알았어.”     


전화를 끊고, 석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영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5주년 아닌가.

이제, 반 차를 쓰고,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한 후, 다음날 낚시를 가면 되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변수는 또 다른 데서 튀어나왔다.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장례식장에서 술도 자제했는데, 무얼 잘못 먹은 걸까?

석우의 아랫배가 전쟁이 난 듯 꾸르륵거리기 시작했다.

설사에 이어, 구토까지, 분명 장염 증상이었다.

석우는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유독 장염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사람이었다.

석우는 급히, 자동차로 가, 가방을 뒤졌다.

낚시 갈 때마다 챙겨가는 상비약엔 다행히 장염약이 있었다.

하지만, 약으로는 안될 거 같았다. 증상이 다른 때보다 심했다.

석우는 급히 동네 병원을 찾았다. 수액을 맞으면 금방 호전되었던 경험이 있어서였다.

기분 탓일까? 수액 효과는 좋았다.

장례식장에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상태가 훨씬 호전되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낚시를 갈 수 있을 듯했다.    

 

“어우, 웬 비가 이렇게 와?”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재민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우는 벌떡 일어나 장례식장안의 방에서 나왔다. 재민이 머리와 옷이 젖어있었다.     


“밖에 비 와?”

“어, 엄청 오는 데? 갑자기 호우주의보네”


석우는 휴대전화로 날씨를 검색했다. 호우주의보가 발령된 상황이었다.

호우주의보라는 변수 앞에선 별 수 없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낚시가 뭐라고 혼자 이렇게 호들갑이었을까?

낚시를 하다 보면, 예측불허의 상황과 마주치는 일이 많다. 기상상황 때문에 취소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여름 내 낚시를 가지 못해서인지 이번엔 많이 아쉬웠다.

별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낚시 갈 생각만으로도 즐겁지 않았던가.

석우는 무언가 설렐 만한 일이 있다는 것이,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취미가

있다는 것이 새삼 좋았다.     


‘우리 아버지는 일만 하셨어. 그러다 일 그만두시고 치매가 오셨지.

취미라곤 없으셨어.’     


장례식장에서 형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열심히 일하면서, 가끔 그렇게 좋아하는 걸 하며 살자고 석우는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에 낚시를 가려했던 건 영서에겐 영원히 비밀이었다.

다음엔, 떳떳하게 말하고 낚시를 가야겠다.

석우는 5주년을 기념해, 영서와 바람 쐬러 갈만한 곳을 찾아봤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영서에게 어울릴 만한 귀걸이를 주문했다.

그 사이에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낮아진다고 했다.

석우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가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봤다.


‘형철이 아버지는 이번 가을을 맞이하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하셨구나.’


나에겐, 몇 번의 가을이 남아있을까.

왠지, 이 비가 애틋해지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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