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추석 >
키워드로 쓰는 숏 스토리,
이번 키워드는 '추석'입니다.
장르: 짧은 소설
민석은 캐나다에 있는 아내에게 문자를 남겼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라고.
일주일 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민석은 추석 연휴가 다가오는 것에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처가댁과 캠핑을 간다는 직장 후배, 이번 연휴엔 해외여행을 간다는 동료, 애인을 만나기로 한 친구 녀석,
모두 연휴를 앞두고 들떠 보였다.
그들에겐 일상성을 벗어날, 그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에겐 일상성을 벗어나는 것들이 꼭 필요했다. 흔히 일탈이라 말하는 그것.
그런 것들이 삶을 환기시켜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민석은 달랐다.
어차피 혼자인 연휴가 즐거울 리 없었다. 상대적으로 더 외로울 뿐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캐나다로 떠난 지 2년, 주위 사람들은 기러기 아빠의 삶을 부러워했다.
누군가의 구속이 없다는 것.
언제든 내 시간을, 내 공간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
그들에게 민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외피만 볼뿐이었다. 그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다는 것에 대해
부러워할 뿐, 내피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보려 하지 않았다.
부러워하는 것도 어쩌면 사회적 반응일지도 몰랐다. 일종의 연기 같은, 사실은 관심조차
없으면서 기계적인 리액션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텅 빈 집에 돌아가는 것.
“잘 잤어?”
“어디 아파?”
“밥 먹었어?”
“늦었네?”
사소한 질문을 해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 외로움이었다.
거기다 집이라는 공간은 무섭게도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을 닮아갔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자주 쓸고 닦고 하는데도, 아이와 아내가 떠난 후, 민석이 혼자
지내는 집엔 생기가 없었다. 오래도록 환기하지 않은 집처럼 눅눅했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곰팡이가 자랄 것만 같았다.
‘연휴 동안 뭐 하지? 밀린 넷플릭스나 봐야 하나...’
이런저런 상념에 파묻혀 담배를 피우는데 회사 후배가 다가왔다.
“연휴에 혼자죠?”
“뭐, 내가 그렇지”
“선배. 이거 안 해볼래요?”
“뭔데?”
후배는 명암을 하나 건넸다.
‘하루의 추억, 친구가 되어드립니다.’
“뭐야 이게?”
“뭐긴 뭐예요. 혼자서 심심한 사람들한테 하루 친구가 되어주는 거지.”
“뭐? 친구? 하루 동안?”
민석은 어이가 없었다. 민석의 머리론 이해 불가였다.
친구란 고로, 오래도록 유대감을 형성해야 하며, 오래도록 빌드업해야 하는, 그야말로
시간이 필요한 관계였다. 물론, 관계라는 것이 만남의 횟수가 전부는 아니지만, 친구는
적어도 시간이 필요한 관계였다. 그래서 나에 대해 많은 걸 알아야 했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기분을
눈치챌 수 있어야 했다.
“낯선 대상이 더 편한 거 몰라요? 한번 보고 말 사람이 더 편하다고요.
그래서 낯선 여행지에서 바람나고 그러는 거잖아요.”
후배는 그러면서 명함을 민석의 슈트 주머니에 넣어주고 갔다.
선배에게 제일 필요해 보인다면서.
민석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뭘 알아? 나한테 제일 필요하다고?’
그런데, 얼굴은 화끈거렸다.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추석 연휴가 되고, 민석은 명함을 잊고 지냈다. 혼자서 납골당에 다녀오고, 혼자서 밀린 영화를 보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매년 다르지 않은 연휴의 첫날이었다.
아내와 아이에게선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나와 있을 때보다 점점 더 젊어지는 듯 생기가 돌았다.
구릿빛 피부에 머리도 짙은 갈색이 되고, 속눈썹도 풍성해 보였다. 내가 없어도, 그들의
삶에 결핍 따윈 없어 보였다. 연기라도 좀 해주지. 그들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들의 즐거운 모습은 민석의 외로움을 배가시켰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민석은 문득 슈트 안에 구겨 넣었던 명함이 떠올랐다.
‘연락, 해볼까?’
어느 정도의 취기가 선택에 도움을 주었다. 취기가 없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
이 순간에 고마웠다.
문자를 보낸 지 5분이나 되었을까. 문제를 보낸 것을 막 후회하고 있던 찰나,
연락이 왔다.
“어디서 뵐까요? 당신의 친구가 약속장소로 가겠습니다.”
누가 올지, 어떤 사람이 올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설렘보다 불안을 가중시켰다.
‘괜찮을까?’
민석은 불안했지만, 만나보고 싶었다.
누구라도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다.
민석은 일단 카페로 약속장소를 정했다.
연휴의 카페는 연인들로 넘쳐날 터, 이왕이면 장사가 잘되지 않는 골목의 조용한
카페를 골랐다. 마치 건물주라도 되는 듯 이상하리만치 손님이 없는데도 문을 닫지 않는
카페였다. 몇 년 동안 지나친 곳인데 민석은 그곳을 처음 가보게 되었다.
카페는 심플 그 자체였다. 사장이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반영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무색무취의 공간이었다. 그저, 이곳에 의자가 필요하니까 의자가 있는, 필요한 것들만 있는 곳이었다.
메뉴도 많지 않았다. 민석은 드립커피를 시켰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장은 공들여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커피를 처음 마신 순간, 민석은 놀랐다. 커피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탄 냄새도 나지 않았고, 적당한 산미와 고소함이 어우러진 맛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민석 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가 민석의 이름을 불렀다.
민석은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이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여자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름이 마루여서 남자라고 생각했다.
“오늘 민석 님의 하루 친구가 되어줄 마루입니다.”
마루는 자리에 앉았다. 민석은 낯선 여성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지금이라도, 무효로 하고 집으로 돌아갈까?를 고민하던 차에
마루가 말을 꺼냈다.
“우린 친구니까, 말 놓을게”
마루는 말을 놓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아.. 네... 응...”
민석만이 부자연스러웠다.
“오늘 하루 어땠어?”
마루라는 여자는 민석의 하루에 대해 물었다. 부인도, 아이도, 누구도 묻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의 하루가 어땠더라... 민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느라 한참을 침묵했다.
모든 단어들이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버린 듯, 민석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허둥댔다.
하지만, 마루는 천천히 민석을 기다려줬다.
“뭐, 맨날 똑같은 하루하루지.”
“어떻게 똑같은데?”
“뭐, 혼자서 일어나서, 혼자서 밥 먹고, 회사 가고, 회사 가지 않는 날엔 혼자 밥 먹고,
청소하고, 유튜브 보고...”
“요즘 뭐가 제일 즐거워? 즐거운 일은 없었어?”
“글쎄...”
“사소한 거라도 좋아. 오늘 커피맛이 좋았다던가...”
“어, 그러네, 여기 커피 맛 정말 좋아서 놀랐어.”
“요즘, 힘든 일은 없었어?”
마루는 계속 질문했고 민석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것이 언제일까?
20여 년 전, 아내와 연애할 때였을까? 그땐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리적 거리도 있지만, 심리적 거리가 더 멀게 느껴졌다.
민석은 낯설었지만, 그런 질문들이 싫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마루는 기다려줬고, 민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내 얘기, 안 지루해?”
민석이 물었다.
“아니, 전혀”
“거짓말 아냐? 어째서 안 지루해. 솔직히 관심 밖의 사람의 얘기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난 안 지루해. 오늘 난 네 친구야.
너의 모든 것이 나의 관심사야.”
민석은 순간 현타가 왔다. 그래, 이 사람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뿐인데
자신이 너무 감정을 실었다 싶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합시다.”
민석은 예정된 시간보다 다섯 시간 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루가 민석의 손을 잡았다.
“이대로 괜찮아?”
마루가 물었다.
“뭘?”
“너의 삶”
내 삶이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민석은 흔들리고 있었다.
“외로워 보여서...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네가 힘들 것 같아서 걱정돼.”
마루의 말이 진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마루의 질문과
말은 민석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듯,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은 이만 갈게. 고마웠어.”
“그래, 필요하면 또 연락해. 네가 필요할 땐 언제든 시간 낼게.”
민석은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얼마쯤 걸었을까. 엄지발가락이 아프다 느낄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민석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받지 않았다.
민석은 문자를 보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나, 너무 힘들어.”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민석과 아내는 오랜 대화를 나눴다.
아내가 민석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만 돌아갈까? 나도 사실은 집이 그리워”
아내가 말이 민석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만 외롭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걸, 민석은 깨달았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이니까, 그 정도는 세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리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마루가 민석에게 해주었던 질문들을, 아내에게도 해줬어야 했다는 걸 알았다.
통화를 끝내고, 민석은 마루의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그리곤,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끓이고, 쌀을 씻어 밥을 했다.
집의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키고, 집 안을 둘러봤다.
싱크대 서랍을 열어 유통기한이 지난 양념들을 버렸다.
왜인지 모르게, 생의 의지가 샘솟았다.
10월엔 휴가를 내어, 캐나다를 다녀올까?
민석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계획들을 세우며 추석 연휴를 보냈다.